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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이 야자수와 함께 있는 곳.

이런 길을 또 어디서 볼 수 있을까.
말로만 듣던 제주 올레길 을 다녀오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토요일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종일 눈이 내린단다. 눈보라가 치는 길을 어떻게 걸을까 걱정하면서 출발했지만, 걱정은 기우였다. 눈덮인 외돌개 산책로를 조금 벗어나니 야자나무가 즐비하게 들어선 산책로가 나타난다. 완전히 다른 나라에 온 것만 같다. 

눈을 맞는 들국화와 귤나무.  

(기억이 맞다면) 범섬을 바라보며 걷는 올레코스. 들국화와 억새 덕분에 이 코스는 가을길 같다.
맑은 날 제주도 걷기 여행도 멋질 테지만, 눈보라가 치던 날 올레길 걷기도 근사했다.
다른 방식으로는 도저히 겪을 수 없는 사계절을 짧은 시간 안에 두루 체험하는 기분이다.

바다의 모양이 이렇게까지 다채로울 줄 몰랐다. 한 고비를 돌 때마다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진 덕에 나중엔 모서리를 돌 때마다 저 너머엔 뭐가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마음이 설렐 정도였으니.

용머리 해안을 향해 걸어갈 때, 눈내리는 바다에 서 있던 배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바다 위에 정박해있던 고깃배들은 마치 다른 세상에서 막 건너온 배들, 혹은 영계를 향해 막 떠나려는 배들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어른어른한 물안개 너머로 배들을 한참 바라보다 보면 코끝이 시린 추위도 잊혀지고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제주 올레길은 기자생활을 오래했던 서명숙 씨가 산티아고 가는 길을 다녀온 뒤 국내에도 그런 길을 만들고 싶다는 소망으로 고향에 내기 시작한 길이다. 그녀의 경험담은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걷기 여행 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한 사람이 꿈을 품은 덕분에 이렇게 멋진 길을 걸으며 행복해질 수 있다니. 그녀에게 고맙기까지 하다.
이 길을 걸으며 행복한 사람은 우리 일행만이 아니었다.
아침에 출발할 때 나이 지긋하신 노부부 일행을 마주쳤다. 올레길을 여러번 걸으셨던 모양인지, 어느 쪽으로 가라고 알려주시면서 쉬엄쉬엄 풍경을 즐기면서 가라고 조언하셨다.
외돌개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다시 걷기 시작할 때 그 중의 한 어르신이 뒤에서 걸어오다 "이 길은 그렇게 그냥 지나가시면 안됩니다"하고 낮고 엄숙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왜 사진도 안찍고 그냥 가느냐, 혹은 이 길에 얽힌 전설 같은 걸 아느냐는 말씀이신가 싶어 쳐다보았는데, 갑자기 그 분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 승무 춤사위를 선보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좋은 길, 춤 추며 지나가야죠"
...코믹하지만 꽤 감동적이었던 그 분의 춤사위. 올레길 못지 않게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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