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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터닝 포인트 4] 엄홍길 - 고산에서 내려와 사람 속으로


Before: 히말라야 8000m급 16좌, 세계 최초 완등
After: 비영리단체  설립, 사회 공헌 활동
Age at the Turning Point:  48

“시간이 남고 돈이 남아 유유자적하게 봉사하는 것 아닙니다. 내가 산에서 목숨을 걸고 한 약속을 지키려는 거예요.”

인터뷰를 하던 날 오전 삼각산에 입춘 산행을 다녀왔다는 산악인 엄홍길 씨(49)의 얼굴엔 봄의 생기가 넘쳐났다.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6좌를 완등한 그에게 540m 높이의 삼각산도 산일까 싶은데, 그는 “사무실 벗어나 산에 오르면 살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5월 비영리단체인 엄홍길 휴먼재단 을 설립해 사회사업을 시작했고 현재 상명대 석좌교수이기도 하다. 호칭이 약간 난감해 “어떻게 불리는 게 좋으세요?” 물었더니 옆에서 커피를 타 주던 재단 직원이 “그야 당연히 대장님이죠” 했다.


그렇다. 그는 여전히 대장이다. 원정대를 이끌고 히말라야에 오르는 대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루트만 달라졌을 뿐이다. 한 편으론 인생 전환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평생 해온 방식 그대로 자신의 길을 내고 있었다.


● ‘제2의 인생’은 살아남은 자의 의무


지난해 5월 “도전의 산에서 내려와 인생의 산에 도전하겠다”면서 재단을 설립한 그는 지금까지 장애인,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산행 체험교실, 네팔 의료 봉사 등을 이끌어 왔다.

이제 본격적인 첫 사업으로 해발 3930m에 있는 고산 마을인 네팔 쿰부히말라야의 팡보체에 초등학교를 짓는다. 사무실 한쪽 벽면엔 초등학교 설계도가 쫙 붙어 있었다. 4월30일 출국해 5월5일 어린이날에 맞춰 착공할 예정이다.

팡보체 마을은 1986년 그가 두 번째 히말라야 등반 도전에 나섰을 때 목숨을 잃은 현지 세르파 술딤 도루지가 살던 곳이다. 그곳에 갈 때마다 유가족을 보살펴온 그는 오지의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초등학교를 짓기로 했다.


초등학교를 짓는 일은 그가 말한 “목숨을 걸고 한 약속” 중 하나다. 그가 ‘제2의 인생’에서 재단 설립을 통해 히말라야 산간 오지의 교육․ 의료 환경 개선, 청소년 교육, 기후환경변화 대책에 나서기로 한 것은 “산에서 얻은 것을 산에 돌려주고 산에서 진 빚을 갚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2000년 8000m 14좌 완등이 가까워질 무렵부터 이 일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도전과 실패 죽음을 수없이 겪으면서도 산의 깊이를 알면 알수록 두려움도 커졌지요. 인간의 능력에는 결국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강하고 기술이 좋아도 마지막엔 산이 우릴 받아줘야 성공할 수 있어요. 산과 내가 하나가 되어야, 욕심을 내지 않고 순리를 따라야 산은 비로소 정상의 자리를 내어줍니다.”


산이 받아주기 전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한 뒤 그에게 남은 것은 기도뿐이었다.

“14좌를 향해 치달을 때 동료도 잃었고…. 살아서 꿈을 이룰 수 있다면 살아남은 자로서 당신(산)에게 받은 보답을 반드시 하겠다고 결심했어요. 다시 16좌를 향해 가면서도 숱하게 기도했어요. 나는 이런 일을 해야 하므로 꼭 살아서 내려가야 합니다, 하고…. 목표 지점에 다가갈수록 그 다짐이 더 간절해졌지요.”


그는 “내가 지금 16좌를 다 오르고도 살아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면서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은혜를 받은 것이니 살아남은 자의 책무를 다 해야 한다”고 말했다.




● 땅에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일어서라

엄 대장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의 성공보다 실패의 경험에 더 귀가 쏠린다. 1985년 히말라야 등정에 도전하기 시작해 2007년까지 22년간 세계 최고봉 16개에 올랐지만, 그 과정에서 모두 17번의 실패를 겪었다. 성공한 것 이상으로 실패해온 셈이다. 게다가 함께 산에 오른 동료 10명이 목숨을 잃는 것을 목격했다.


그가 3번의 도전 끝에 첫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1988년 에베레스트 첫 등정에 성공한 뒤 그는 의기충천했지만 1993년까지 5년간 안나푸르나, 낭가파르바트 등을 대상으로 시도한 6번의 등반이 모두 실패했다. 절망 속의 그를 붙들어준 말은 불가의 가르침인 ‘땅에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일어서라’였다. 다시 일어서서 1993년 7번째 도전한 초오유 등정에 마침내 성공했을 때 그는 “실패와 좌절의 시간이 드디어 나한테서 떨어져 나갔다”고 느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같은 해 시샤팡라에서 그는 동료 박병태 대원을 잃었다. 1998년 네 번째 시도한 안나푸르나 등정에선 미끄러진 셰르파를 구하려다 같이 추락해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중상을 입고 ‘산행 불가’ 선고를 받기도 했다.


“제가 경험하기론 성공과 실패엔 큰 차이가 없어요. 중요한 건 실패를 피하는 게 아니라 실패를 다루는 방식입니다. 실패와 현실의 불행을 끌어안고 거기에 고착되면 영영 벗어나질 못해요. 실패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배우고 불가항력이었다면 ‘이럴 수도 있겠지, 더 나빴을 수도 있는데’하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후회하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 했다면 겉으로 드러난 실패는 진짜 실패가 아니에요.”


숱한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99%가 불가능해 보여도 1%의 성공 가능성이 보이면 시도하는 결단력 덕분이었다. 그의 별명은 ‘탱크’다.

“산에서 갈등의 순간은 수도 없이 많아요. 지금 출발할까 말까, 더 올라갈까 말까, 이 길이 나은가 아닌가, 계속 결정해야 해요. 게다가 눈사태 같은 위험이 예고하고 일어나는 일도 아니잖아요. 결단력과 팀워크를 통해 최선을 다 하되 순리에 따르는 겸허함이 결합되어야지요.”


하나의 일에 정통하고 실패와 성공을 오래 겪으면 나중엔 ‘육감’도 발달하기 마련이다. 그는 “어느 산은 처음부터 가긴 가야 되는데 이상하게 거리감이 느껴질 때가 있고 험한데 끌리는 산이 있다. 그런 육감이 대체로 적중했던 편”이라고 들려주었다.



● 8000m도 한 걸음에서 시작됐다


고산 정복에 비한다면 사회공헌사업을 하는 ‘두 번째 도전’은 쉽지 않느냐고 묻자 엄 대장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고,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산에서는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의기투합하니까 오히려 더 명료할 수 있어요. 여기서는 어떤 방향으로 가려고 해도 여러 사람들을 접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해야 하니까 스트레스를 더 받게 되지요.”


그러면서도 그는 “천천히 가야지요. 8000m도 한 걸음에서 시작됐어요. 조급한 마음으로 자꾸 보폭을 넓히다 보면 주저앉게 됩니다”하고 덧붙였다.


히말라야 오지 지원, 기후변화 대책 마련 등과 함께 그가 관심을 갖는 분야는 청소년들의 정신력을 키우는 일이다.


“산행 체험학교를 해보면 청소년들이 신체적으로는 크지만 정신적으로 허약하다는 걸 절감합니다. 뭐든 쉽게 이루려 하고 쉽게 좌절해요. 전 그게 자연과 동떨어진 생활 때문이라고 봅니다. 요즘 학교에선 체육시간도 점점 없앤다는데 등수로만 따지면서 허약한 성인으로 자라면 뭐하나요. 배려나 이해심은 말로는 못 가르쳐요. 자연 속에서 행위를 통해 깨달아야 하는 덕목이죠.”


성인에게도 그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중년에 인생의 전환을 꿈꾸는 사람을 위한 조언을 청하자 “인생은 끝없는 도전의 연속이므로 변화를 두려워 말라”고 들려주다가 가장 그다운 방식으로 말을 맺었다.


“운동을 하세요, 운동을! 뭘 하든 자신감과 긍정적 사고가 가장 중요한데 그것도 에너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에요. 자기 몸이 피곤하면 도전이고 자시고 무슨 의욕이 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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