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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 선생 가라사대

한가함의 독

sanna 2009. 8. 18. 01:15

“정신은 어떤 문제에 전념하도록 제어하고 강제하는 일거리를 주지 않으면 이런 저런 공상의 막연한 들판에서 흐리멍덩히 헤매게 된다. (……) 마음은 일정한 목표가 없으면 갈피를 잡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말처럼, 사방에 있다는 것은 아무 곳에도 있지 않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
최근 나는 은퇴하여 가능한 한 내 여생을 편안하게 살아가는 일밖에는 어떠한 일에도 참견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 그러나 나는 '한가함은 항상 정신을 산란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정신은 고삐 풀린 말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백 곱절이나 더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내 정신은 순서도 목적도 없이, 수많은 몽상과 별난 괴물[망상]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망상들의 괴이함과 터무니없음을 관찰하기 위해, 그리고 언젠가는 내 정신이 그것들을 보고 스스로 부끄러워하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그것들을 적어두기 시작했다. ”


- 몽테뉴 ‘수상록’ 1권 8장 ‘나태에 대하여’ 중에서 -
(* 앞의 세 문장은 손우성 역 '몽테뉴 수상록'에서, 그 뒤의 문장들은 김석희 역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홋타 요시에)에서 각각 따온 것)


시간이 많으면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시간에 쪼들려 못했던 일들을 다 해치우리라, 별렀다. 읽고 싶은 책, 쓰고 싶은 글, 만나고 싶은 사람, 가고 싶은 곳……, 그 모두를 게걸들린 듯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회사를 그만둔 지 두 달째. 그동안 오래 일했으니 당분간은 좀 놀아도 된다고 자위하며 한량이 되었지만 뭔가 슬슬 좀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지극히 단순해진 일상이 맘에 들지 않은 것은 아니나, 손대는 일의 종류가 뭐든 ‘품질’로 따지자면 회사를 다니며 머릿속이 번잡했던 때보다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뭘 했다고 하기도 참 거시기한 상태랄까. 예전 같으면 자투리 시간에나 해치울 ‘일 같지도 않은 일’(창피해서 굳이 열거하진 않겠다)들이 요즘은 하루의 주요 일과다. 책을 쌓아두고 읽지만 돌아서면 금방 뭘 읽었는지 다 잊어버린다. 오래 보고팠던 사람을 만나도 별 흥이 안 나고,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다. 시간이 많다고 해서 많아진 시간만큼 뭔가를 더 하거나, 그만큼 더 유익하게 쓰는 게 절대로 아닌 거였다. 거 참.....

마치 텅 빈 변두리 극장에서 혼자 3류 영화를 보듯, 아무 맥락도 없이 뜬금없는 장면들이 어지러이 출몰하는 내 머릿속을 건성으로 관찰하며 ‘그런데 지금 왜 이 생각을?’ 같은 질문을 가끔씩 던져보며 하품이나 하는.....한심해서 더 말할 거리도 못된다. 내가 얼마나 자율성과 거리가 먼 인간인지를 매일 확인하자니 어떨 땐 약간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변함없는 ‘가로 본능’의 자세로 뒹굴던 어느 날, 이런 내게 ㅉㅉ 혀를 차지 않고 되레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게 해주는 친구를 마침내 책 더미 속에서 발견했다.


몽테뉴. 이 아저씨 볼수록 웃기고 마음에 든다.

내가 갖고 있는 ‘수상록’ 완역본의 표지는 이렇게 나름 간지 나는 얼굴인데…….


이건 모냐. 다른 책의 표지를 보면 대체로 이렇다. 알랭 드 보통의 책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에 삽입된 몽테뉴의 초상화도 이 달걀 귀신 분위기. 뜨아~~~


어쨌거나,

홋타 요시에가 쓴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를 보면 이 아저씨도 38살 때 법관 생활을 때려치우고(!) 성으로 돌아와 연구와 저술활동을 하며 ‘자유롭고 조용하고 한가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갈망했다.
근데 성에 돌아온 그가 먼저 한 일은 라틴어로 두 개의 명판을 새겨 서재 옆방의 난로 위 벽에 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나는 나 여기 돌아왔노라 하는 내용, 또 하나는 세상을 먼저 뜬 친구 에티엔 드 라 보에시에 대한 추모사다.

내용이야 흠잡을 데 없지만 서재에 들어앉아 제대로 책을 쓰기도 전에 명판부터 걸다니......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자 예나 지금이나 ‘가오’잡는 인간들은 여전하다며 킬킬거렸다.


자, 명판도 걸었겠다, 이제 서재 안에서 무엇을 쓸 것인가.

딱히 당장 쓸 만한 게 없었던 듯하다. 위에 인용한 몽테뉴의 나태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나는 경망스럽게도, 공부 좀 해보겠다며 책상 위를 싹 치워놓고서는 정작 책상 앞에 앉으면 엎드려 잠이나 자던 내 고교시절이 생각 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겠노라 명판까지 팠는데 ‘한가함은 정신을 산란하게 한다’는 고백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오죽 당혹스러웠으랴. 결국 그는 가장 잘 아는 대상, 자기 자신을 책의 재료로 삼는다.


‘나는 내 삶을 내 행위로 기록할 수는 없다. 운명이 그 행위를 너무나 하찮은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 삶을 내 생각으로 기록한다.’


나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해도 삶을 생각으로 기록하는 것보다 행위로 기록하는 것이 몇 백배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어쨌거나 삶을 생각으로 기록해준 몽 선생 덕분에 한가함에 슬슬 불편해지던 스스로를 생각해보고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위대한 교양인’도 저러시는데 뭘~ 좀 더 놀아도 되지 뭐‘ 하는, 써놓고 보니 말도 안 되는 괴상한 결론에 도달하며 마음이 편해지게 되었다.

유익한 책. ^^ 책상 위에 펼쳐두고 오며가며 틈날 때마다 영양제처럼 복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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