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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오피니언 사이트 [훅]에 쓴 글입니다. (훅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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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은 곳에서 일하기 시작한 뒤 나는 아이들이 자신이 분류되는 방식에 얼마나 민감한지 절감하곤 한다. 예컨대 ‘다문화’를 생각해보자. 공식적인 법률 명칭도 ‘다문화가족지원법’인데다 지방자치단체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있고 기업이 지원하는 ‘다문화’ 행사가 넘쳐난다. 이렇게 보편화하였으니 가치중립적 용어가 된 걸까? 내가 일하는 단체의 권리 교육에 참여했던 열한 살 난 ‘다문화’ 여자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학교에서 선생님이 다문화 가정 손들라고 맨날 그러잖아요. 그럼 손을 드는데 저밖에 손드는 애가 없잖아요. 그러면 애들이 ‘쟤 다문화인가봐’ 어쩌고저쩌고 하고….”

‘다문화는 손들라’고 요구하는 무신경한 교사 탓에 꽤 오래 따돌림을 당했던 이 아이는 “너는 우리와 달라. 저리 가!!”하고 내치는 친구들에게 “아니야. 나는 너와 같아”라고 항변하는 포스터를 그리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한 귀퉁이에 별표를 치고 ‘중요’라고 적어 넣었다.


북한을 탈출해서 온 아이도 다르지 않다. ‘탈북자’의 부정적 이미지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새터민’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지만, 권리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한 아이는 자신이 겪은 차별의 경험을 털어놓으며 이렇게 물었다.

“왜 자꾸 우리를 새터민이라고 불러요?”


아이의 개별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 편리하게 그룹의 특성으로 분류하는 사람은 대체로 어른들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배우는 대로 따라 한다. 경기도의 한 지역아동센터에서 일하는 교사는 “다문화 어린이만 방과 후 교육을 따로 받고 그룹으로 불려 다니다 보니, 급기야 이들끼리 똘똘 뭉쳐 이젠 이 아이들이 부모가 둘 다 외국인인 이주 노동자의 자녀들을 차별하는 태도를 보인다”고 걱정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40여 년 전 미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시작된 유명한 실험 ‘파란 눈, 갈색 눈’을 떠올렸다. 1968년 4월 미국에서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된 다음날, 주민이 모두 백인인 아이오와 주 작은 마을의 초등학교 3학년 담임교사였던 제인 엘리엇이 시작한 파격적인 실험이다.

차별당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믿었던 엘리엇은 아이들을 파란 눈, 갈색 눈 그룹으로 각각 나눈 뒤 첫날엔 파란 눈 아이들이 갈색 눈 아이들보다 훨씬 똑똑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파란 눈 아이들에겐 쉬는 시간도 5분 더 주면서 특별대우를 했고 갈색 눈 아이들은 멀리서도 눈에 띄도록 목에 스카프를 두르게 했다.

엘리엇은 아이들에게 ‘나와 다른 사람을 이러저러하게 대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룹을 나눠 한쪽이 더 우월하다고 말하고 다르게 취급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전에 서로 친했던 아이들은 불과 15분도 지나지 않아 심술궂고 치사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두 번째 날엔 서로 역할을 바꾸어 이번엔 파란 눈 아이들이 차별받는 경험을 치러야 했다.

실험이 끝난 뒤 엘리엇이 아이들에게 차별받는 기분이 어땠냐고 물으니 아이들은 앞다투어 “줄에 묶인 개가 된 기분” “누가 나를 감옥에 가두고 열쇠를 내버린 거 같았다”고 털어놓았다. 차별 실험이 끝나자 아이들은 스카프를 찢으며 환호성을 질렀고, 10여년 뒤 성인이 되어 만난 이들은 “지금까지 받은 모든 교육 중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그 실험을 술회했다.

이 실험을 다룬 PBS 다큐멘터리 ‘분열된 교실(A Class Divided)’은 분리와 차별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데, 무엇보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건 호칭을 둘러싼 다툼이었다.

3학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파란 눈, 갈색 눈’ 실험을 하던 첫날, 아이들 사이에서 주먹다툼이 벌어졌는데 그 이유는 파란 눈 아이가 친구인 갈색 눈 아이를 이름 대신 “야, 갈색 눈!”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차별 당하는 그룹이 된 파란 눈 집단의 한 여성은 엘리엇이 “거기 파란 눈 세 사람”이라고 부르자 “나한테도 이름이 있다. 내 이름을 불러 달라”고 거세게 반발했다.

누가 ‘우리’이고 누가 ‘그들’인지를 분리하지 않았다면,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던 아이들이 친구를 ‘야, 갈색 눈!’이라고 부르는 일도, 그렇게 불렀다고 친구를 때리는 일도, “나에게도 이름이 있다”고 반발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우리’와 ‘그들’이 나뉘면 사람들은 아주 신속하게 ‘그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만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우리’ 집단의 구성원에 대해서는 개별성과 개인이 처한 상황의 맥락을 고려하지만 ‘그들’ 집단에 대해선 개별성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그들’일 뿐이다. 개개인이 모두 다르고 각양각색인데도 피부색이나 종교 빈부격차 등의 단서처럼 ‘그들은 모두 똑같다’는 걸 암시하는 쉬운 표지를 발견하면 개개인의 차이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니 일부러 그룹을 나누건, ‘다문화는 손들어’라는 지시에 의해서건, ‘나와 다르다’는 구분을 발견한 그 순간부터 어제까지 친구였던 내 짝의 이름이 사라지고 ‘갈색 눈’ 또는 ‘다문화’가 된다.


‘그들’에 속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위에 소개한 포스터에 “나는 너와 같아”라고 써넣었던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다문화 가정이라고 저는 생각 안 해요. 어차피 같은 민족인데 다문화 가정이라는 말은 필요 없는 말이잖아요. 똑같이 사람이고 말만 다를 뿐인데.”


‘우리’와 ‘그들’의 구분이 생각의 수고를 덜기 위해 거의 본능적으로 작동되는 범주라 할지라도 나와 다른 사람이 나처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능력, 다른 사람의 마음이 어떨지 짐작할 수 있는 능력, 낯선 사람과 ‘우리’를 맺는 능력은 인간성의 필수불가결한 부분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적어도 교실 안, 아이들이 함께 배우는 공간 안에서는, 특히 각기 다른 아이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가르치는 교사의 머릿속에서는 ‘그들’에 대한 구분과 경계가 없어야 한다. 그래야 개별성에 대한 고려가 시작되고, 개인의 고유함을 알아보게 되고 “야, 갈색 눈!” “야, 다문화!” 대신 아이들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게 되는 것이다.

<포스터=ⓒ세이브더칠드런, 사진=ⓒP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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