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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들과 연극수업을 하면서, 영화배우 캐스팅 제안이 들어왔는데 사진을 보고 적당한 배역을 골라보자고 제안했다. 사진엔 백인 남녀, 동남아시아 여성과 흑인 남성이 있었고 필요한 역할은 사장과 악마, 천사, 걸인이었다. 캐스팅 결과 아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악마에 흑인 남성, 사장에 백인 남성, 천사에 백인 여성, 걸인에 아시아 여성을 골랐다. 아시아 여성에 대해선 “가난하게 생겨서”가 이유였고, 흑인 남성은 “무섭게 생겨서” “손에 총을 들고 있어서 (총이 아니라 카메라였다)” 악마로 골랐다.

사실 놀라운 일도 아니다. 어른들부터 무턱대고 백인을 선망하는 반면 동남아인을 깔보는 사회에서 아이들이 피부색에 따라 편견을 갖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사방에서 ‘다문화’를 말하지만, 이 단어는 ‘미국, 유럽이 아닌 우리보다 못한 나라 출신’이라는 부정적 개념이 되다시피 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이민자 출신국의 다변화, 다양한 문화 소개 등이 거론되는데, 과연 효과가 있을까?


자신과 다른 타자를 받아들여 함께 살아가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차별하는 건 사람의 오래된 습성이다. 인류학 조사에서도 ‘우리’와 ‘남’을 구분하지 않는 사회는 알려진 바가 없다. 본성이 그렇다면 나와 다른 남을 차별하는 마음을 바꿀 방도가 없는 걸까? 그렇지 않다.


1954
년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심리학자 무자퍼 셰리프는 ‘로버스 케이브’ 캠프라고 불린 유명한 실험을 했다. 전부 백인 중산층 출신인 열 살 소년 22명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순차적으로 캠프장에 도착했다. 각 그룹은 이름과 심벌, 규칙을 만들고 놀다가 엿새째가 되던 날, 캠프장에 다른 그룹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날부터 두 그룹 사이에서는 열 살짜리 소년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욕설과 증오를 동원한 싸움이 시작됐다. 여기까지만 보면 절망적이지만 셋째 주에 연구진은 이들이 집단 구분을 포기하고 전체를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실험했다. 캠프의 유일한 물탱크 꼭지를 막아버리거나, 멀리 데려가며 일부러 트럭을 고장 내자 새로운 환경에서 두 그룹의 소년들은 서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비하하는 충동도 수그러드는 동시에 ‘우리 편’에 대한 열광도 시들해졌다. 1주일 뒤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소년들은 그룹 구분을 완전히 무시하고 섞여 앉았다.


이 실험의 결론은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사람을 좇아 한 패가 되는 게 아니라, 한 패가 되고 난 뒤 서로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고개를 주억거리다가도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만약 백인과 흑인 소년 그룹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어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까? 비슷한 의문을 품은 다른 심리학자가 9년 뒤 실험을 재연했는데 이번엔 종교분쟁이 심한 레바논에서 기독교인 열 명과 무슬림 여덟 명을 모았다. 연구진은 소년들을 섞어 ‘푸른 유령’과 ‘붉은 요정’ 팀으로 나누었다. 예상대로 그룹 간 싸움이 벌어졌지만, 뜻밖에 이 싸움은 기독교 대 이슬람이 아니라 유령 대 요정 팀 사이에서 일어났다.


두 실험이 들려주는 것은 ‘우리’와 ‘그들’이라는 분류는 고정된 실재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으므로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문화 사회의 해법도 여기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가령 ‘로버스 케이브’ 캠프의 소년들처럼 ‘우리’의 폭을 넓힌다면 어떻게 될까?


한국의 다문화 논의는 여전히 외국인 ‘그들’을 다루는 문제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이제는 다문화 사회가 ‘그들’ 문제가 아니라 ‘우리’ 과제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특정 집단을 받아들일 것이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당면한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첫걸음은 사회의 다수자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가해자가 될 수도 있음을 스스로 의식하는 것이다. 그래야 소수자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 가능해지고, 더 나아가 다문화를 자기 문제로 인식하며 수평적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그래야 ‘함께 사는 우리’가 된다. 다문화 아동을 대상으로 한 동화(同化) 교육 대신 한국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국제이해, ()차별 인권 교육이 더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 자 내일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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