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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재/밑줄긋기

초조함

sanna 2013. 5. 13. 00:51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고 무관심 때문에 거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주된 죄가 단 한 가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초조함일 것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추방되었고, 초조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카프카, 고병권의 글 '초조함은 죄다' (바로가기)에서 재인용)

이틀 내내 아무 할 일 없는 시간을 맘껏 즐기다 밤에 읽은 고병권의 글 '초조함은 죄다'에서 눈에 띈 대목. 어제 빈둥거리다 되는대로 손에 잡힌 소포클레스 전집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과도 겹친다

'오이디푸스 왕'을 오래 전에 읽을 땐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비극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제 다시 읽으니 다른 점들이 계속 눈에 띄었다. 이를테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거라는 저주를 받았다고 그 즉시 왜 아이를 갖다 버렸나. 아이에게 아버지를 죽일만한 힘이 생기기 전까지 좀 기다려볼 것이지...'안티고네'도 마찬가지다. 그 똑똑하고 위엄있는 안티고네는 왜 그렇게 일찍 죽어버리자고 맘 먹었을까. 지하도 지상도 아닌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조금 더 생각해볼 수는 없었을까... 우리가 운명이라 여기는 비극도 어쩌면 좌절과 고통이 지나가도록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약함,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동시에, 끔찍한 불행에도 "꼿꼿이 머리 세우고" 할 말을 하는 주인공들의 의지도 눈에 띄었다. 오이디푸스는 비극의 전모가 드러나 제 눈을 찌르고 추방 당하기 직전에도 처남에게 딸들을 돌봐달라고 집요하게 말한다. 안티고네는 통치자의 법을 어기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스스로의 신념을 좇아 통치자의 법을 기꺼이 위반한다. 예전에는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운명의 거대함으로 읽었던 이야기들이 이번엔 상당히 다른 이야기로 다가왔다. 운명도 사람의 어리석음과 서로 다른 계획이 충돌하여 빚어지며, 그렇게 어떤 운명이 빚어지건 사람은 여전히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결정한다.

 

오늘은 여기저기 들락거리다 고병권의 글을 발견하게 됐는데, 위의 글에서 고병권도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거론하며 이렇게 말한다.

"신탁이나 예언은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 딱 한 가지 일만을 했다. 그것은 주인공들을 초조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면 파국에 대한 초조감이 상황을 파국으로 이끌어간다."

그는 철학이 필요한 이유를 여기에서 이끌어낸다.

"초조함을 몰아내려는 치열한 노력이 또한 철학이라고, 철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철학 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 파국을 막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요즘 내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특정 주제는 질릴 정도로 곱씹느라 결정을 잘 못하지만 대체로는 반응이 너무 빨라서 후회하는 일이 잦다. 기질적으로 성격이 급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불확실하고 애매하고 불편한 것을 견디는 능력, 정신과의사 하지현씨가 '내공'이라고 불렀던 그 힘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싶다.

불확실함을 받아들이고, 견뎌내고, 기다리고, 둘러보고, 멈춰 서고, 찬찬히 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몇 달 사이 내 삶이 별 말을 걸지 않고 휙휙 지나가버렸던 이유는들으려 기다리는 자세, 애매한 것을 견디는 '내공', 살펴보고 반추하려는 의지가 부족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간만에 이틀 내리 할 일도, 만날 사람도 없이 빈둥거리며 시간을 탕진했더니 충만한 기분. 이런 여백, 너무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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