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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쪽 저지곶자왈을 지나는 14-1 코스는 제주올레 홈페이지에 난이도가 ''으로 분류돼 있고 아마 가장 많은 주의사항이 적힌 코스가 아닌가 싶다.

길을 잃을 위험이 있으며 식당 상점이 전혀 없고, 통신장애도 발생할 수 있으며, 여자 혼자는 위험하다... 출입이 제한된 문을 더 열어보고 싶은 것처럼 올레코스를 고를 때마다 이 코스를 자주 기웃거렸더랬다. 여긴 언제 가보나...

그러던 중 우연히 제주올레 행사 안내 메일에서 22일 14-1 코스 함께 걷기 행사를 발견하고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비행기 표를 샀다. 엄마 칠순 기념 가족여행으로 제주도를 다녀온 지 2주밖에 안되었는데, 그땐 렌트카 여행이라 올레를 걷지 못했으니까 빼먹은 걸 하러 가야지 하는, 말이 되는 것도 같고 안 되는 것도 같은 이유로 여행을 결정.

표를 사고 나니 주말에 해야 할 중요한 일들, 꼭 만나야 할 친구의 얼굴, 얼른 만들어야 할 강의자료 등이 뒤늦게 줄줄이 눈앞에 어른거렸으나... 일단 가자, 했다. 이번에 가지 않으면 14-1 코스가 없어지기라도 하는 양 왜 그렇게 마음이 절박했던지.

 

 

위험한 길이라니 함께 걷기 행사를 따라가려고 온 건데, 생각보다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먼저 출발. 사람들이 뒤에 따라올테니 안심이라고 생각하며 먼저 출발했는데, 도착지에선 우리가 꼴찌였다. 올레꾼들이 '놀멍쉬멍 걸으멍'하는 대신 거의 달리는 수준의 걷기 달인들이란 걸 실감. -.-;;;

위의 사진은 시야가 탁 트이는 문도지 오름 정상에서 내려다본 곶자왈이다. 멀리 보이는 저지오름과 또 다른 오름. 제주를 자주 다니다 보니 이 섬의 느낌을 특징 짓는 가장 중요한 풍경은 바다보다 오름이라는 걸 절감하게 된다. 사진작가 김영갑 씨가 왜 그렇게 오름에 몰두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순하게 엎드린 생명체의 잔등과도 같은 오름들이 없었다면 '평화의 섬'이라는 헌사도 어색하고 서걱거렸을 거 같다.

 

곶자왈 올레를 걸으러 간다고 생각했을 때 머릿속에 그렸던 풍경은 지난해 친구들과 함께 갔던 거문오름의 곶자왈 숲이었다. 그 때 울창한 숲 속에서 온 몸이 서늘해지는 기운이 잊히지 않아서, 이번에도 컴컴하고 자궁처럼 깊숙하며 '원령공주'의 등장인물들이 막 튀어나올 것 같은 숲을 상상했다. 몸이 달아 절박하게 달려왔던 것도 생명의 근원지 같은 곳에서 약간 소름이 돋을 정도로 깊은 기운에 휘감겨보고 싶었던 마음이었달까.

 

 

하지만 누구나 걷도록 길을 낸 올레코스가 출입을 엄격히 제한한 거문오름의 곶자왈 숲과 같을 수는 없겠지... 아쉽게도 내가 그리던 깊고 서늘한 기운은 없었다. 수풀과 돌들이 뒤섞여 어지러운 숲 속에서 적당히 터프한 6시간 짜리 트레킹을 마친 느낌. 약간 아쉬웠지만 동행한 후배와 시시덕거리는 농담에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고민까지 종횡무진 오가며 나눈 대화가 즐거웠고 최근 드물게 코스를 완주한 작은 성취감도 좋았다. 가기 전에 괜히 절박했던 마음도, 길을 걷고 돌아오니 평온하다.

언제부턴가 정기적으로 도시를 떠나 오래 걷거나 산에 오르며 적당히 도전적인 환경을 몸의 긴장과 이완으로 겪는 경험을 해야 일상을 꾸려갈 에너지가 충전되는 듯하다. 밖에 나가 방전을 해야 충전이 된다니 좀 희한한 방식이긴 하지만, 나 자신이 그렇다는 게 괜히 안심이 된다. 생명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생명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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