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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난한 수백 가구를 먹여 살렸죠. 그러나 언제나 먼저 내가 돕는 가난한 이들이 내 마음에 드는 얼굴들인지 보러 갔죠. 선의를 가진 남자들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절대적인 것을 찾는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척하며 잡아먹는 다른 여자, 그러니까 이름도 없고 얼굴도 온기도 없는 추상적인 인류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이게 사실이라면 인류는 정말이지 여성형이 맞을 거예요. 이 사치에는 견유주의가 아니라 꽤 많은 양의 허무주의가 들어 있는 것 같아요."

 - 로맹 가리의 '레이디L'에서 -

 레이디L이 연적으로 삼은 '다른 여자' '얼굴 없는 추상적인 인류'. 인류애 넘치는 아나키스트 연인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는 데에 실패한 레이디L은 인류를 '다른 여자'라고 불러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구체화했다. '다른 여자'에 대한 혐오는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하루 종일 세탁통에 고개 처박고 일해야 했던 아내를 한 번도 도와주지 않은 레이디L의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도 뿌리가 같다.

 

그 혐오를 감정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라도 인류를 '다른 여자'라고 구체화해야 할 만큼, 땅에 내려오지 않은 추상적 대상에 대한 사랑 또는 혐오를 할 줄 모르는 여자. 그런 레이디L을 보며 20대 초반의 나를 지배했던 구절 두 개가 단박에 떠올랐다. 하나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반 (이름이 맞나 모르겠지만)이 한 말. 

"추상적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구체적 한 인간을 사랑하기 어렵다." (기억이 정확한지 자신이 없지만 대강 이렇다)

또 하나는 문학평론가 채광석씨의 시집에서 읽은 한 구절이다.

"앓아 누운 사람들 사이에 따라 누워 신음소리만 흉내 내었나 보다."

신음소리만 흉내 내는 듯한 스스로를 더 참을 수 없어, 어줍잖게 주변에서 얼쩡대기만 하던 노동운동을 포기했다. 추상적 이념 대신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 보고 싶다는 애매한 기대를 품고 신문기자가 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나이가 들면서 20대 때의 번민을 잊었다.

그 고민이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선명하게 다시 떠오를 줄이야... 역시 인생의 어떤 문제든 끝났다고 완료 시제로 선언하고 밀쳐둘 수 있는 건 없다. 언제고 되돌아온다.

 

내가 지금 일하는 NGO '아동' '국제개발'이 정체성의 중요한 두 축이다. 정책, 제도와 관련된 일을 주로 하는 탓에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내게서 '아동'은 많은 권리에서 배제된 소수자 집단, 즉 추상적 개념으로 머물러 있을 때가 태반이다. '국제개발'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내게 이 개념은 '세계 평화' 만큼이나 거대하게 들려서 생경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만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의 일이 몸에 잘 안맞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주로 내가 거대한 개념들의 주변을 얼쩡거리며, 더군다나 '당사자'도 아니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추상어로 일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들 때이다. 그럴 땐 다시 앓아 누운 사람들 사이에 따라 누워 신음소리만 흉내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되돌아온 20대 때의 질문에 이번엔 어떻게 대답하느냐가 요즘의 내 화두다. 정책과 제도의 개선, 물론 중요하다. 거시적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필요하다. 하지만 애시당초 이 일이 왜 필요한가, 하는 질문 앞에서 추상적인 아동, 국제개발은 나의 답이 아니다. '인류' 를 '다른 여자'라고 바라보았던 레이디L처럼...

 

오늘은 여기까지 낙서 끝. 글을 하도 안쓰다 보니 스스로 놀랄 정도로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게 힘들다. 예전엔 어떻게 글을 쓰고 살았나 몰라.... @.@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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