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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매일 읽는 오에 겐자부로의 글.

성급히 뛰어내려 다가갔다가 화가 나서 떠나버리는 부인보다, 자기가 할 일을 찾아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소녀의 방식을 기억하기 위해.

 

(지적 장애를 지닌 42살 장남 히카리가 보행훈련을 하다가 넘어진 뒤 오에 겐자부로가 자신보다 훨씬 무거운 아들을 안아 올리느라 애쓰던 상황을 설명한 뒤)

 

"자전거를 타고 온 나이 지긋한 부인이 뛰어내리더니 "괜찮아요?"하고 말을 걸면서 히카리의 몸에 손을 댔습니다. 히카리가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은, 낯선 사람이 자기 몸을 건드리는 것과 개가 자기를 보고 짖는 것입니다. 이럴 때 저는 자신이 에부수수한 노인이라는 것을 알지만,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어 달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화가 난 채 가버린 후, 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역시나 자전거를 세우고 저희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녀를 봤습니다.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내보였습니다. 그것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잠깐 저에게 보이기만 하고는 주의 깊게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
잠시 후 히카리가 일어나고 제가 그 옆에서 걸으며 돌아보자 소녀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가뿐히 자전거를 타고 떠났습니다. 저에게 전해진 메시지는, 내가 여기서 당신들을 지켜보고 있다, 구급차나 가족에게 연락할 필요가 있으면 휴대전화로 협조하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걷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떠난 그 소녀의 미소띤 인사를 잊지 못합니다
.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즈음 항독전선에 참여했다 죽은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의 말에 저는 끌렸습니다. 불행한 인간에 대해 깊은 주의를 갖고,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습니까?'하고 물어보는 힘을 가졌는가의 여부에 인간다움의 자격이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
불행한 인간에 대한 베유의 정의는 독특합니다만, 갑작스럽게 넘어진 것에 동요하는 저희도 그 자리에서는 불행한 인간입니다. 이쪽이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의 적극적인 선의를 보여준 부인도 베유가 평가하는 인간다움의 소유자입니다. 오히려 이런 때에도 자신에게 집착하는 저 자신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
게다가 불행한 인간에 대한 호기심만 왕성한 사회에서 저는, 주의깊고 절도 있는 그 소녀의 행동에서 생활에 배어 있는 새로운 인간다움을 찾아낸 것 같았습니다. 호기심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만, 주의 깊은 눈이 그것을 순화하는 것입니다
."


- 오에 겐자부로 '말의 정의'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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