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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터넷을 달군 ‘불법체류자 자녀에게 특혜를 주는 한국판 이민법 논란’은 오해에서 비롯된 한바탕 소동으로 끝났다. 정청래 의원이 발의했고 미등록 이주아동의 교육권, 의료권 보장이 골자인 아동복지법 개정안이 ‘이자스민 의원이 발의한 이민법’으로 잘못 알려져 발생했던 논란은 잠잠해졌으나, 불씨는 여전하다. 이번 논란으로 불거진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비난에는 다소 우려스러운 구석이 있다.

 

이주아동권리보장법은 대통령의 선거공약이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문제에만 국한해서 보면 보수적인 여당이 야당보다 앞서간다. 이 문제에 열심인 이자스민 의원이 여당 소속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주아동권리보장법 제정을 추진해온 사회단체들은 애초에 이 법안 대표 발의자로 이주와 무관한 야당 의원이 더 적절하다고 보고 협의를 진행했지만, 유권자들의 반발을 우려한 해당 의원의 거부로 결국 무산됐다.

 

야당을 지지 (혹은 여당을 싫어)하면서도 이주민을 혐오하는 그 유권자들이 이번 ‘한국판 이민법 논란’의 진원지였다. 사회연결망 프로필에 권위주의적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바란다고 적어둔 이들이 딱 그 권위주의적 정부, 경찰의 시각으로 이주민을 바라보며 ‘우리 권리를 빼앗아간다’고 비판한다.

 

무수한 비판 중 일상생활에서 이주민에게 실제로 피해를 당한 경험에 근거한 주장은 찾기 어려웠다. 대개 ‘왜 내가 낸 세금으로 불법체류 아동을 돕느냐’는 논리다. 내가 낸 세금으로 남을 돕는 사회보장제도는 비난하지 않는 자칭 ‘민주주의자’들이 미등록 이주아동의 기본권 보장에 대해서는 ‘세금이 아깝다’는 논리를 들이댄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부모들도 한국에서 일하며 사는 이상 지역 경제의 한 부분을 맡고 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세금을 낸다는 것도, 간접세 비중이 50%에 육박하는 한국에서 세금을 내지 않고 생활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안중에 없다.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 위험을 타자와 관련짓는 반응은 근대 이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어온 현상이다. 매독이 유럽을 휩쓸던 15세기에 매독은 영국에선 ‘프랑스 두창’으로, 프랑스에선 ‘독일병’으로 불렸다. 아프리카 줄루족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에서도 질병의 발생을 ‘타자’와 연관 지어 이해하는 반응이 관찰됐다. 위험을 타자와 관련짓는 반응은 피지배집단에서도 곧잘 드러난다.

 

이주민에 대한 증오는 이주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 타자 비난, 희생양 찾기의 가장 흔한 형태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공적 소통의 장이 사라지고, 인권이 하찮고 허무맹랑한 가치로 취급당하며, 잘못된 정보에 기반한 증오가 인터넷을 타고 순식간에 증폭되는 사회에서는 이주민에 대한 과장된 공포가 더욱 쉽게 확대 재생산된다. 이번에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주아동이 그러한 외부의 희생양이 됐다는 점이다. 아동의 보호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너무나 손쉽고 무차별적으로 타자를 증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만큼 불안과 위기의 구조가 사람들의 일상과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반증인 걸까.

 

이자스민 의원은 조만간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안’을 대표 발의할 예정이다. 이 의원을 마땅찮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민법 논란’ 때와 유사한 십자포화를 쏟아 붓기 이전에 누구의 입장에서 누구를 비난하는지 생각해봤으면 한다. 정부나 경찰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시민의 시선으로 보면 미등록, 이주자, 아동이라는 삼중의 취약성에 노출된 나약한 존재에게 적대적일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권리의 보장은 특별히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원래 갖고 있는 자격을 인정해주는 거다. 아이들은 부모의 자격과 무관하게 존재 자체로 그 자격을 갖고 있다.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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