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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온갖 분야에서 자주 거론되는데 정작 찾아보기 어려운 희귀한 덕목으로 나는 ‘역지사지’를 꼽겠다.

 

정치권에선 ‘네가 문제’라고 비난할 때에도, 비난을 멈추자고 호소할 때에도 역지사지를 들먹인다. 이른바 ‘갑질’ 논란에서도,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공무원 연금 개혁 논란 때에도, 여성혐오에 남성혐오 패러디로 맞선 인터넷 논란에서도 곧잘 등장하는 단어다. 가치관이나 입장, 이해관계가 팽팽히 대립할 때 사람들은 늘 서로에게 역지사지를 요구한다. 그러나 역지사지로 문제를 해결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거의 없다.

 

모두가 주장하지만 누구도 실천하지 않는 이 말이 쓰이는 맥락도 점점 기이해져 간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선 자기반성 없는 가해자가 반격에 나선 피해자에게 역지사지를 요구한다. 급기야 ‘역지사지 콘셉트’를 전면에 내세운 한 방송의 오락 프로그램에선 욕설과 비난이 오가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역지사지, 감정이입, 공감 등 엄밀하게는 약간씩 다른 뜻이지만 비슷하게 쓰이는 개념들의 공통점은 ‘나와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마치 내 것처럼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어느 정도는 타고나는 능력인데다, 주변에 대충 물어봐도 누구나 역지사지에 근거한 자신의 공감 능력을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오락 프로그램의 소재로 쓰일 정도이니, 요즘엔 ‘모자라면 이상한’ 덕목처럼 간주되는 듯하다.

 

하지만 실천하는 모습을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 정말로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의 연구 결과들도 ‘다른 사람의 신을 신고 걸어보는’ 공감의 능력이 이질적인 사람들의 공존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낭만적 기대를 배반한다.

 

우선 공감은 편협하다. 혈연, 인종, 국적, 유사성, 가치의 공유 등으로 금을 그은 집단의 경계, ‘내 편’의 울타리를 좀처럼 넘어서지 못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대체로 공감력이 낮다. 다른 사람 처지에 서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공통의 경험도 꼭 공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현재 그 일을 겪는 사람에게 가장 덜 공감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어떤 연구자들은 미래의 위험을 예방하는 정책을 세우려면 공감을 제쳐놓고 생각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기후변화, 고령화 사회 등에 대처하려면 미래의 추상적인 혜택을 위해 현재의 사람들에게 비용을 부과해야 하는데, 대체로 사람들은 막연한 대중의 고통, 미래의 큰 비극보다 특정한 개인, 눈앞의 아픔에 더 공감하기 때문이다.

 

공감의 능력이 확대되는 건 아름답지만 저절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어렵게 익혀야 하는 일이다. 흔히 상상하는 것과 달리 공감의 확대는 어쩌면 감성이 아니라 이성을 발휘해야 도달 가능한 목표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마치 자신이 겪는 양 느낀다 해도 고통의 원인을 잘못 인식하면 행동이 엉뚱해지듯, 그릇된 인식이 공감을 왜곡하는 일도 잦다. 나와 다른 사람과 공존하는 기술, 갈등의 해결,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을 이야기할 때 역지사지의 확대, 공감의 향상을 핵심에 놓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네 이웃과 적을 사랑하라’보다 더 나은 이상은 다음과 같다고 했다. ‘네 이웃과 적을 죽이지 마라. 설령 그들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의 선을 정하는 게 먼저다. 소수자로 살아가는 사람의 처지를 한번 생각해보자고 권하기보다 차별금지법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 역지사지하고 공감하는 능력보다 사적 관계에선 예의, 공적 관계에선 정책과 제도가 우리의 공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더 인간적인 장치다.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장 (한겨레신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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