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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을 드라마로 옮긴 ‘송곳’의 방영이 끝나는 날마다 소셜미디어에는 노동상담소장으로 나오는 구고신의 명대사를 옮긴 글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라온다. 구고신의 명대사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이라는 무서운(?!) 제목의 책을 쓴 미국의 노동운동가 사울 알린스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해서 널리 알려졌던 이 운동가도 21세기 한국에 있었다면 구고신처럼 말했을 것 같다. 이를테면 이런 대사.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 안 들어. 좋은 사람 말 듣지.”


옳은 말을 하면 사람들이 따를 거라는 기대는 얼마나 순진한가. 누구나 자기 경험에 비추어 세상을 본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당위만 주장할 게 아니라 상대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고 상대의 가치관을 존중하며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이게 알린스키의 주장이다. 나는 ‘송곳’의 구고신이 말한 ‘좋은 사람’도 이런 사람을 뜻하는 말일 거라고 이해했다.


알린스키는 40여 년 전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러 나섰으나 번번이 실패하는 활동가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는 세상에 대한 낭만적 기대를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 즉, 영원히 행복한 결말도, 영원히 슬픈 결말도 없고, 흑백으로 나뉠 수 없는 세상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환상의 거미줄을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세상에 난무하는 거친 구호, 누구의 마음도 두드리지 못한 채 자위에 그치고 마는 뻔한 주장들을 한번 둘러보기만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목적과 수단의 관계, 전술 등을 설명하는 각론으로 들어가면 알린스키는 부패하고 유혈이 낭자한 세상에서 사람들을 조직하는 방법에 대해 냉정하고 신랄한 전략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착한 마음으로 세상을 훈훈하게 덥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약간 놀랄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에 대한 통찰, 냉엄한 현실감각이 뛰어나지만, 그것뿐이었다면 알린스키가 그토록 인상적이진 않았을 거 같다. 내가 알린스키를 각별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만들려 투신한 사람이면서 어떤 종류의 ‘확신범’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정신은 과연 우리가 옳은지를 살펴보는 내적 의심이라는 작은 불빛을 통해서만 빛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거대한 희망 대신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약간의 희미한 전망”만 있으면 우리는 세상의 한 구석을 바꿔보려는 꿈을 품을 수 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자신의 삶을 포함하여 인간의 삶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스스로 발견한 사실을 의심하고 시험”하려는 노력을 거듭한다면 어쨌든 한 발짝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가든 자기 시각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가 “덧없는 순간 동안만 타오르는 조그마한 티끌”임을 알아차리려면 유머감각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실험하고 웃으며 걷기. 알린스키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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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블리'라는 스타트업이 펴내는  What We're Reading  뉴스레터에 한 달에 한 번씩 독후감(?)을 쓰기로 함. 신문에 한 달에 한 번 쓰던 칼럼도 바빠서 쓸 시간 없다고 그만뒀으면서,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인상깊은 책은 메모를 해두는 오랜 습관 때문에 그냥 어렵지 않고 재미있겠다 싶어서 손 번쩍 들고 시작. 콘텐츠를 새로운 방식으로 가공해보려고 여러 시도를 하는 젊은 친구들의 모습이 예뻐보여 (이거 완죤 할머니 마인드 ㅠ) 주변에 얼쩡거리고 싶기도 했다. 내가 하는 많은 선택이 그랬듯 즉흥적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글을 쓰다보니 나는 일과 아무 상관없는 글을 하루에 한 줄이라도 읽거나 써야 숨통이 트이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걸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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