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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재

걷는 듯 천천히

sanna 2016. 1. 13. 22:43

제일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원더풀 라이프’를 만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에세이. 하루키의 에세이나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언뜻언뜻 연상시키는 대목들. 독특한 일본풍같은 게 있달까. 목소리 높이지 않고 자분자분한 말투로, 심각해지지 않고 경쾌하면서도 그냥 휙 지나치지는 않는 찬찬한 시선 같은 것.

일테면 감독이 ‘사람은 상중에도 창조적일 수 있다’는 어느 책의 구절을 읽으며 떠올렸던 촬영의 경험. 나가노 현의 한 초등학교를 3년에 걸쳐 취재했는데, 한 학급의 아이들이 송아지를 키워 교배를 시키고 젖을 짠다는 목표를 세우고 3학년 때부터 계속 송아지를 돌봐왔더란다. 그러나 5학년 3학기가 시작되기 조금 전, 예정일보다 빨리 어미소가 조산해버렸다. 울면서 송아지의 장례식을 마친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일은, 아이들이 염원했던 젖 짜기 였다. 사산을 했어도 어미소의 젖은 매일 짜야만 했다. 학생들은 짠 젖을 급식 시간에 데워 마셨다. 즐거워야 할 이 젖 짜기와 급식은 본래 기대했던 바와는 달랐다. 그 아이들 중 하나가 '상(喪)‘중에 쓴 시는 이랬다고.


"쟈쟈쟈

기분 좋은 소릴 내며ᅠ

오늘도 젖을 짠다

슬프지만 젖을 짠다"


이어지는 감독의 말.

기분은 좋지만 슬프다는, 슬프지만 우유는 맛있다는, 이 복잡한 감정을 알게 된 걸 성장이 아니면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ᅠ내가 창작을 하며 죽음이 아니라 '상(喪)'에 집착하며 홀리게 된 출발점은 틀림없이 여기라 하겠다.”


또 영화 ‘공기인형’을 만든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하는 말.

 

"인간은 자신의 결점을 노력으로 메우려 한다. 그러한 노력은 현실에서도 영화에서도 미덕으로 그려진다. 꽤 오래전부터 말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혼자만의 힘으로 그런 극복을 이뤄낼 수 있을까? 해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일까?

...

나는 주인공이 약점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키며 세계를 구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한 게 아닐까.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 오다기리 조가 연기한 무책임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말은 영화를 볼 때도 머릿속에서 전구가 반짝 켜지듯 인상적이었던 표현이었다.

 

"세상에는 쓸모없는 것도 필요한 거야. 모두 의미 있는 것만 있다고 쳐봐. 숨막혀서 못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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