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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구경

쿠바와 바이칼

sanna 2018. 3. 25. 10:42

사망 직전 노트북을 정리하다 문득. 

지난 해는 그야말로 여행의 해였다. 친구들과 여러 곳을 누빈 국내 여행은 일단 빼고 해외 여행만 꼽아보면, 연초 다녀온 히말라야 트레킹을 비롯해 6월엔 바이칼, 9월엔 쿠바, 11월엔 일본을 다녀왔으니.

기록을 정리 못했는데 노트북 정리하다 보니 쿠바 여행은 인터뷰를 한 적이 있고, 바이칼 여행은 페이스북에 올린 간단 여행기가 남아있다.

아래 링크는 지난해 9월 쿠바 여행을 다녀온 뒤 브런치 인터뷰 글. 내가 말할 때 '되게'라는 구어체 부사를 되게 많이 쓴다는 사실을 깨달음 ;;

쿠바에서는 아직 모든 것이 살아있다

아래는 지난해 6월 바이칼에 다녀온 뒤 페이스북에 쓴  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은 바이칼 호에 다녀오다.

블라디보스토크 ->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고 하바롭스크 -> 비행기 타고 이르쿠츠크 -> 배 타고 바이칼 호 알혼섬에 갔다가 이르쿠츠크를 통해 나오는 여정.

우리가 갔을 때 하필 아름답기로 유명한 알혼섬 북부지역은 산불로 여행이 금지된 상태였다. 미처 꺼지지 않은 산불 여파로 계속 뿌연 안개가 피고 장작 떼는 듯한 냄새가 났다. 아쉬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배를 타고 바다라 불러야 더 적절할 바이칼 호 위로 떨어지는 해를 보고, 부르한 곶에 매일 산책을 가고, 얼음물 같던 바이칼 호에 몸을 담그고, 사륜구동 승합차 우아즈를 타고 덜컹거리며 사방으로 지평선이 뻗어 있는 남부 지역을 돌아다녔다. 사람이 한 없이 왜소해지는 자연의 광활함, 나 없이 온전한 우주의 무심함을 느낄 때마다 맘 속에 차오르는 해방감은 이번에도 예외 없었다. 그 뿐만 아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달리며 바라본 황홀한 노을, 블라디보스토크와 '시베리아의 파리'라 불리는 이르쿠츠크에서 거슬러 올라가본 러시아 혁명사, 함께 겪은 사람들끼린 잊을 수 없을 온갖 해프닝들….

그 모든 풍광들보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친구들이었다. 거의 혼자 여행을 다니던 내게 올해는 특별한 해다. 어울려 노는 맛을 배웠달까. 1월에 히말라야도 어울려 다녀왔는데, 이번 바이칼 여행자는 무려 14명(+ 블라디보스토크는 1명 더). 돌아온 뒤에도 어떻게 가능했는지 생각할수록 신기한 여행이다. 촛불과 탄핵이 만든 여행이라고 해야 하나. 함께 촛불집회에 다니던 지난 연말, 한 친구가 바이칼에 가고 싶다는 말을 꺼내자 너도나도 손을 들었는데 그게 14명이 됐다. 대학 친구들인데 같은 과는 한 명도 없고, 서너명끼린 가깝지만 촛불집회에서 처음 만난 친구도 있다. 공통점은 87년을 강렬하게 겪고 16,17년의 촛불집회에 열심히 참여했다는 점 뿐. 공통의 유대가 있지만, 첫손에 꼽는 절친이라고 할 수는 없는 14명이 패키지 상품도 아니고 우리끼리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여행이라니. 

오합지졸 여행단의 1주일이 폭망으로 끝나진 않을까, 가기 전부터 우리 뿐 아니라 못 가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걱정이 많았다. 러시아에서 7년 일해 러시아어를 잘 하는 친구를 비롯하여 각자 성가신 일을 기꺼이 나눠 맡은 친구들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여행이다. 모험과 재앙은 종이 한 장 차이인데 아슬아슬한 순간에도 서로 경험이 훼손되지 않도록 배려하고 참아준 친구들 덕택에, 이번 여행은 지금까지 해본 ‘함께 여행’의 최고봉이라 할 만했다. 많이 웃고 낄낄거렸고, 많이 걸었고, 많이 마셨(;;;)다. 평소 하지 않던 속 깊은 이야기도 꺼내게 됐다. 제대로 이해 못했던 이념에 포박된 젊은 날에 대한 이야기며, 맹목에 붙들린 채 나이들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촛불을 들고 다시 만난 게 얼마나 신이 났던지, 50줄에 접어든 지금도 여전한 혼란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들.....

한 친구가 "30년만의 정리MT"라 부른 것처럼, 각자는 힘겹고 치열했으나 서로에겐 눙치고 살아온 세월과 현재의 우리를 이야기했다. 각자 자기자리에서 조금씩 꼼지락거리며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애쓰는 친구들에 대해 느슨하지만 구체적인 연대감을 확인하는 기회였달까. 그 과정에서 나는 오래 맺혀 있던 불필요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도 겪었다. 어정쩡하게 갈팡질팡 살아오면서 오래 짖눌려온 부채감, 열패감 같은 것에서 풀려나는 느낌! 훌훌 가볍다.

돌아온 뒤 텔레그램의 그룹방은 ‘바이칼 앓이’를 하는 친구들의 정다운 아우성이 자자하다. 돌아오는 날 환영을 나온 친구 (환영을 나오다니! 그 뿐이랴, 공항에 태워다주며 환송해준 친구도 있었다! 이것만 봐도 평소 얼마나 우리가 사고뭉치들이었는지, 얼마나 다른 친구들이 같이 가고 싶어했는지를 알 만하다)말로는, 우리가 달라져서 돌아왔다고 한다. 누가 말하면 집중해서 들어주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 갖는 자세가 생겼다고 한다. (예전에 얼마나 자기 말만 한 거냐 ㅠ). 꼰대 예방 여행이었나보다. 다행이다. 목소리 톤도 낮아졌다고 하는데(예전에 얼마나 시끄러웠으면 ㅠ), 그게 유지되는지 오늘 번개 모임에서 확인해볼 참이다. 결론은 오늘 또 만나서 논다는 기승전놀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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