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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고요한 물건들

sanna 2018. 10. 7. 22:25


오래되고 고요한 물건들을 보고 싶어 중앙박물관에 갔다. 

신안해저문화재 흑유자 특별공개전.

695년 전 침몰한 무역선에 실려 있던 찻잔과 다기들. 그 시절에 유행했던 거품을 내는 차에 어울리는 먹빛의 찻잔들. 종이를 잘라 장식한 치자꽃 무늬며, 1300도의 고온에서 흘러내린 유약이 만들어낸 토끼털 무늬며. 거의 700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칠기처럼 윤기가 흐르는 자기들을 들여다보면서 공들여 이 물건들을 빚어냈을 도공들을 상상한다. 


심한 두통으로 친구들과 함께 가기로 한 트레킹을 취소한 주말, 김서령 작가의 부음을 들었다. 오래 전 내가 일했던 신문사에 실린 칼럼으로 처음 알게 됐던 사람. ‘생활칼럼니스트’라는 필명, 따뜻하고 담백한 글이 인상적이었다. 무심한 듯 마음으로 스며드는 글이랄까. 그의 글이 좋아져서 그가 월간지로 옮겨가서 쓰던 인터뷰, 연재들을 따라다니며 읽어왔고 페이스북 친구도 맺었지만, 사적 인연은 없다. 

 알지 못하는 사람의 부음이 왜 그토록 서글펐을까. 토요일 거의 종일 그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들을 몰아 읽으며 한숨짓고 눈물 흘렸다. 아름다웠던 사람. 아름다운 것들을 모으며 자기 일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아름다운 글을 쓰고, 사람들을 따뜻하게 품으며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던 사람. 병을 얻은 뒤 생을 정리하며 자기가 아끼던 물건들이 버림받지 않고 자기처럼 아껴줄 사람들 품으로 가도록 나눠주는 전시 ‘물목지전’을 열었던 사람. 마음을 둔 물건과 사람이 많았으니 돌아볼 미련과 집착이 왜 없었겠냐마는, 비우고 비워 가벼운 몸으로 훨훨 이 세상을 떠나간 사람.

그의 타계를 슬퍼하는 동시에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한없이 부끄럽다. 황폐한 내 일상. 저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순간이나 그런 걸 느낄 줄 아는 마음이라는 게 내 안에 남아 있기는 한가. 이뤄야 할 목표만으로 가득 찬 메마른 생활, 끝없는 전투에 나간 전사마냥 거칠어진 심상, 사람들을 품기는커녕 판단하고 배치하는 메마른 정서만 가득한 요즘의 나.... 

혼자 있어도 부끄러워지는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김서령이 ‘물목지전’에 내놓은 물건들의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오래되고 고요한 물건들을 보고 싶어졌다. 고요한 물건들이 품은 세월과 거기에 배인 정성을 보면 부끄러운 내 마음도 좀 달래질까. 그의 전시회 부제는 ‘다정하고 고요한 물건들의 목록’이었다. 다정함과는 연이 먼 방식으로 살아와버린 삭막한 인생이니 그저 오래되고 고요한 물건들을 들여다볼 수밖에. 오래 쓰지 않은 글이라 원래 신통치 않던 연장이 녹슬어버려 무슨 말을 더 어찌 적을지 모르겠다. 그저 애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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