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조지프 캠벨. 돌이켜보면 별 것도 아닌 일로 마음이 캄캄하던 때, 이 책을 읽었다. 지식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얻은 책이다. 비교신화학자인 저자는 세계의 신화를 수집해 ‘천의 얼굴’을 가졌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한 영웅의 여정을 탐구한다. 어느 나라에서건 신화 속 영웅의 모험은 대체로 분리, 입문과 시련, 귀환의 단계를 따른다. 많은 문화에서 성인이 될 때 치르는 통과의례의 단계와도 유사하고 출생과 성장 죽음으로 이어지는 개인의 삶과도 닮았다. 그런 에너지의 순환을 우주의 원리라고 바라보는 인류의 누적된 지혜가 집단적 기억이라 할 신화에서 드러나는 것이다.저자가 섬세하게 대조해 보여주는 신화 속 영웅의 여정은 결코 녹록치 않다. 영웅적 귀환이 서릿발 같은 증오에 맞닥뜨릴 때도 ..
최근 북유럽의 한 도시에 갔을 때의 일이다. 번잡한 광장의 한 구석에서 특이한 모양의 목조 건물을 발견했다. ‘침묵의 예배당’이라고 한다. 대화와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바깥의 소음에서 뚝 떨어져 고요히 자기 안으로 침잠하기를 권유하는 공간. 반가운 마음에 긴 의자에 앉아 침묵의 세계로 가라앉기를 기다렸지만 바람은 금세 무너졌다. 자리에 앉기는커녕 계속 움직이며 스마트폰으로 몰래몰래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때문이었다. 실망스러웠지만 그들만 탓할 일도 아니지 싶었다. 어디를 가든, 멋진 풍경과 작품, 맛을 경험하기 전에 촬영부터 하는 게 많은 사람들의 습관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렇게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자신을 변호라도 하듯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남는 건 사진뿐이잖아.” ‘침묵의 예배당’에서 스스로 침묵..
몇 년 전만 해도 해외원조랍시고 개발도상국의 오지에 학교 하나 덜렁 짓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를 지어 취학률은 높아졌으나 교재도 없고 교사도 부족해 학교를 몇 년씩 다닌 아이들이 여전히 글을 읽을 줄 모르는 황당한 사례도 숱했다. 지금은 많이 발전해서, 건물만 짓고 손 떼는 몇 달짜리 국제개발협력사업은 거의 없다. 교육을 예로 들면 현지에 상주하는 민간단체들이 최소 3년 이상 학교 건물을 고치고 양질의 교육을 위한 교재를 만들며 교사를 길러낸다. 국제개발협력사업에서 민간단체의 역할은 점점 확대되는 추세다. 민간단체들은 개발도상국 정부 주도의 개발에서 배제되기 쉬운 빈곤층 아이들과 여성, 소수자에게 가닿고 소외된 이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일을 한다. 9월 유엔개발정상회의가 채택한 ‘지속가능개발목표..
“오늘의 결정은, 결정을 내리는 어른들보다 나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8년 전 발리 기후변화회의에 참석했던 15살 소녀의 말이다. 어떤 사안이든 아이들과 관련된 일을 다룰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일을 결정한 성인보다 더 큰 영향을 받게 될 아이들의 의견을 듣는 것임을 잊지 않으려고 책상 옆에 붙여두었다. 재난이 발생할 때 구호단체 역할의 최우선 순위는 긴급한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인데, 내가 일하는 단체가 빠뜨릴 수 없는 또 하나의 과제는 재난을 겪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시리아와 남수단의 분쟁 때에도, 태풍 하이옌이 덮친 필리핀, 대지진이 일어난 네팔에서도 우리 스태프들은 쑥대밭이 된 마을을 돌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고서를 썼다. 아이들에게 뭐가 필요한지 빤히 짐작할..
상대가 나를 사랑하거나 깊이 의지한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 상태에서 힘을 휘두른다면, 이는 신체적 상해에 더해 상대의 마음을 악랄하게 모욕하는, 질이 나쁜 폭력이다. 다수의 가정폭력이 그렇고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폭로된 데이트 폭력도 그 한 예다. 피해자의 증언에 따르면 가해자는 폭행의 이유로 ‘네가 구타유발자’라며 피해자 탓을 했다. ‘맞는 것보다 그를 잃는 게 더 두려웠다’던 피해자는 맞을 짓을 계속하는 자신을 탓하며 더 좋은 연인이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와 매우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폭력의 맥락에서도 들은 적이 있다. 재작년 겨울 세상을 놀라게 했던 아동학대사망사건 이후 민간단체와 국회의원이 함께 만든 진상조사위원회에서 사무국장을 맡아 학대로 숨진 아이가 살던 지역에..
5월 31일은 네팔의 아이들에게 특별한 날이었을 것이다. 두 차례의 대지진으로 수업이 중단됐던 지진영향지역 학교들이 이날 공식적으로 수업을 재개했기 때문이다. 이날이 특별했으리라 짐작하는 이유는 내가 일하는 단체의 후원으로 서울대학교 사회복지연구소를 비롯한 15개국 연구자들이 실시한 ‘아동의 삶의 질’ 조사에서 네팔 아이들의 응답을 보고 나서다. 건강, 물질적 만족, 가정환경 등 삶의 질을 구성하는 여러 지표 중 네팔 아이들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영역은 학교였다. 이들의 학교에 대한 만족도는 조사에 참여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높았다. 조사 시점인 지진 발생 이전에도 네팔의 학교 사정이 열악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활동으로 ‘학교 가기’를 꼽은 답변에선 어떤 간절함까지 느껴진다. ..
이제 한국도 예외가 아닌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대형 참사가 아이들에게 남기는 상처는 길고도 깊다. 네팔 대지진 긴급구호 대응을 거들던 와중에 타산지석이 될까 하여 내가 일하는 단체가 올해 1월에 펴낸 ‘아이티 지진, 그 후 5년’ 보고서를 다시 읽었다. 5년이 지났지만 운명을 바꾼 그날의 상황은 아이들에겐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이를테면 벽이 머리 위로 무너질 때 함께 있던 아기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떨치지 못하는 소년 장탈은 해마다 대지진이 일어난 1월 12일만 되면 지독한 두통에 시달린다. 여전히 그 기억을 앓고 있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삶이 뒤흔들린 아이들에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행복의 모습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의 이유는 저마..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지난달 말 정부가 발표한 ‘안전혁신 마스터플랜’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규 교육과정에 안전 교육이 의무적으로 포함된다는 내용 뒤에 기사가 이렇게 이어져서다. “이에 따라 앞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에 해당 과목이 신설될 가능성도 점쳐진다.” 깜짝 놀라 정부의 공식자료를 찾아보니 다행히 몇몇 기사가 언급한 ‘안전교육의 수학능력시험 포함 검토’ 같은 대목은 없다. 하지만 섣부른 추측보도라고 무시하기엔 찜찜하다. 시험에 넣으면 경쟁적인 주입식 교육이 되지만 시험과 무관하면 있으나마나한 과목이 되는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므로, ‘중요’하고 ‘의무적’인 과목이라면 시험에 포함되리라 짐작하는 게 무리도 아닐 것이다. 과연 학교 안전교육은 어떻게 진행되어야 좋은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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