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와 함께 한 여행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울려오면 여전히 온몸이 쭈뼛해지며 발이 들썩거린다.…제트기나 시동 걸린 엔진소리, 징 박은 말발굽 소리만 들어도…속이 뒤틀리듯 가슴이 꽉 메는 것이다.’
마음을 들뜨게 하는 바이러스엔 약도 없다. 이 오래된 불치병에 속절없이 포로가 된 자는 몸이 근질근질한 청춘이 아니라 58세의 노작가다.
저자는 “미국에 관해 글을 쓰면서도 미국의 시궁창이 풍기는 진짜 냄새를 모른다면 범죄에 해당될 일”이라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중병을 앓고 난 뒤였지만 “수명을 조금 더 늘이자고 장렬한 삶을 버릴 생각은 없다”며 짐짓 호연지기도 부린다.
작은 집을 얹은 트럭을 주문 제작해 돈키호테의 애마인 ‘로시단테’라는 이름을 달고 넉 달간 미국 34개주, 도합 4만 리 여행길에 나섰다.
여행기라고 하지만 관광성 정보, 미국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원하는 사람은 이 책에 적당한 독자가 아니다.
책을 읽다보면 지명이나 저자가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는 서서히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그보다는 유머작가였다가 탐정이더니 어느새 역사가가 되고 철학자, 저널리스트로 마구 변신하며 종횡무진으로 독자를 이끌고 다니는 저자와의 여행에 푹 빠져들게 된다.
아름다운 번역 덕분에 산문인데도 리드미컬한 문장의 감칠맛이 제대로 살았다.
더군다나 그 무엇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 몸살을 앓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필독서다.
노작가의 길벗은 프랑스산 푸들 찰리였다. 찰리는 저자가 길 위에서 남과 사귈 때 ‘목적하는 사람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가 대화할 기회를 터주는 대사(大使)’이면서, 저자의 고독을 달래주는 대화 상대이기도 하다. 저자가 고독할 때 곧잘 찰리를 상대로 푸념을 늘어놓는 대목은 훈훈하고 정겹다.
이 여행에서 저자가 가이드가 아니라 주인공인 까닭에 소심하고 정이 많은 그의 캐릭터, 남에 대한 마음씀씀이도 생생하게 눈앞에 드러난다. 시카고 근처 호텔의 청소를 하지 않은 방에서 잠깐 쉬게 된 저자가 세탁소 꼬리표, 휴지통의 쓰다만 편지, 담배꽁초, 술 깨는 약의 포장 튜브 등으로 그 방에 먼저 머물던 ‘쓸쓸한 해리씨’를 상상해보는 대목 등에서는 탁월한 이야기꾼의 재주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시대의 쓸쓸한 공기도 여행기에 스며들었다. 저자가 여행을 한 1960년은 흑백 인종갈등이 심각하던 때였다. 뉴올리언스에서 인종차별주의자의 광기를 목격한 저자는 분노때문에 여행을 그만두고 귀로에 오른다. 그의 여행은 “출발보다 앞서 시작되었고 돌아오기 전에 먼저 끝나” 버렸다. 생각해보면 사실 모든 여행이 다 그러하지만….
이 책을 말하려면 번역자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 없다. 밑줄을 긋고 싶은 대목이 수시로 출몰할 정도로 아름다운 문장은 순우리말을 적절하게 써가며 공들인 번역에 힘입은 바 크다. 1965년 삼중당 문고로 출간된 것을 이번에 새로 펴낸 것인데도 번역글이 고루하지 않고 세련됐다.
평생 이 책 한권만을 번역서로 남긴 역자는 이미 세상을 떴고 책 끝엔 역자의 아들이 쓴 후일담이 실렸다. 저자와 직접 연락해 뜻을 일일이 확인해가며 번역을 했다던 역자의 노력이 감동적이다.
출판사는 유가족의 뜻에 따라 번역 인세는 역자의 모교인 서울대 영문과에 장학금으로 기부하기로 했다고 한다. 따뜻한 뒷마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