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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멋졌다

김인배에게.

sanna 2007. 12. 29. 19:04
인배야.

어제 겨울 산에 혼자 올랐다.

쨍하게 시린 공기가 내 안으로 스며들어와 몸속을 맴도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지더구나. 막혀있던 것이 툭 트이는 기분. 산에 오길 잘했구나, 생각했어. 인적이 끊긴 등산로에 낙엽이 쌓여 드러눕고 싶을 만큼 푹신하더라. 이파리를 벗어버린 길고 가느다란 나무들이 정직해보였다.

중턱에 올라 헐벗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봤어. 가만히 널 불러보았다. 인배야, 잘 지내니? 그곳은 춥지 않니? 우린 모두 잘 지내려 애를 써. 그러니 여기 일은 걱정하지 말고 부디 편히 쉬렴….


네가 간지도 벌써 석 달째에 접어드는구나. 전화를 받고 미친 듯이 달려가던 그 가을날, 괘종시계의 추가 멈추듯 내겐 모든 게 정지되어 버렸다. 그날 이후 벌어진 일들이 아득하고 나쁜 꿈처럼 느껴져…. 그런데도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서 그동안 계절이 바뀌고, 이제 해가 바뀌려 한다.


올해가 가기 전에 네게 작별인사를 꼭 해야 하겠다는 조바심에 편지를 써.
작별인사, 라고 말하고 나니 속에서 저항감이 치밀어 올라온다. 어떻게 널 보낸단 말인지….

어떻게 널 잊겠니. 누나가 작별하고 싶은 건, 널 잃은 슬픔을 너를 앞세운 내 운명에 대한 한탄으로 은근슬쩍 바꿔치기 하려드는 나 자신의 청승에 대해서다. 시간이 빨리 흘러 어서 늙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바랐는데, 문득 흐르지 않는 건 시간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걸 알아차렸어.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건 너도 원하는 바가 아니겠지. 이젠 내가 흘러가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일상의 윤곽을 다시 그리려고 애를 쓰는 요즘도, 무심히 걷다가,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자려고 누웠다가, 갑자기 아,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발작처럼 가슴이 조여 온다. ‘심장이 오그라들 것 같다’는 말이, 물리적으로 이해가 되더구나….

꿈 많고 건강하던 너의 목숨이 왜 30여 년 만에 끝나야 했냐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대답 없는 질문을 붙들고 못난 누나는 오래 몸부림쳤다. 부모님의 참혹한 고통을 지켜볼 때마다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하늘에 대고 종주먹질을 해댔어. 왜, 도대체 왜 이래야 했냐고.

지금도 그 질문이 날선 비통과 함께 불쑥 찾아오면, 대답할 말이 없어 가슴을 움켜쥐고 쩔쩔맨다. …다만,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이제 받아들여야 한다고 되뇔 뿐이다. 성경 속의 욥이 말했듯 ‘내 머리로 헤아릴 수 없는 일들’에 대해 더 이상 지껄이지 말자고, 탄식은 할지언정 자기연민에 빠져 징징거리지는 않았던 욥처럼, 이제 받아들이자고….


인배야.

내 안의 일부가 너와 함께 죽어버렸지만, 동시에 너의 어느 한 부분은 내 안에 살아있다는 걸 느껴.

며칠 전 가족과 함께 떠난 여행지에서도 그랬다. 함께 모여 밥을 먹을 때, 좋은 걸 볼 때, 먼 길을 갈 때, 넌 우리 옆에 앉아있거나 같이 감탄했고 같이 차 안에서 눈을 감고 잠을 청했지. 널 실제로 만질 수 없어 서러웠지만 그렇게라도 느껴지는 네 존재감이, 좋았어.

못견디게 네가 보고 싶을 때마다 누나는 눈을 감고 상상한단다.

네 각막을 이식받은 사람이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또렷하게 바라보며 웃는 모습, 네 심장판막을 이식받은 아이가 더 이상 가쁜 숨을 몰아쉬지 않고 편안하게 들이마실 겨울 공기. 단단하던 너의 뼈는 어떤 이의 몸 안에서 함께 나처럼 겨울 산을 오를지도 모르겠다.

조직기증을 할 땐 네가 마지막으로 좋은 일을 하도록 해주자는 생각뿐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널 그리워하는 가족에게 더 좋은 일이었지 싶다. 네가 숱한 생명 속에 살아있다고 생각하면, 네가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는 것만 같아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는구나.


인배야.

하와이 원주민들은 인생을 파도라고 생각한다더라. 파도가 자신이 바다의 일부분이라는 걸 모른다면 바위에 부딪혀 깨질까봐 두렵고, 앞서 바위에 부딪혀 사라진 다른 파도의 죽음을 슬퍼할 테지. 하지만 바다의 일부분임을 깨닫는다면 슬퍼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고….

얼마 전 무심히 사진 파일을 훑어보다 지난해 아버지 칠순 기념 가족여행길에 찍은 네 스냅사진을 봤어.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우비도 훌러덩 벗어던지고 웃음을 터뜨리던 네 얼굴. 폭포 앞을 유영하던 새들과 함께 네가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만 같은 착시에 눈앞이 흐려진다.

인배야.

그렇게 크게 웃으며 훨훨 날아가렴. 부딪혀 깨져도 사라지지 않는 폭포의 물줄기가 되렴. 이 지상에서 오로지 너만이 선물할 수 있었던 기억을 안고 누나도 바다에서 함께 흐르마.
네가 살아있을 때 한 번도 말하지 못했던 인사를 뒤늦게 전한다. 나의 동생, 김인배.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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