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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제자백가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상앙, 이사와 같이 천하 통일을 이끈 사람의 삶도 결국 비극으로 끝납니다.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룬 것이 많을 수 없습니다. 꼬리를 적신 여우들입니다. 그 실패 때문에 끊임없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자위합니다. 한비자의 졸성 (拙誠)이 그런 것이라 하겠습니다. 졸렬하지만 성실한 삶, 그것은 언젠가는 피는 꽃입니다.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한 말입니다. '땅을 갈고 파헤치면 모든 땅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 피우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사실입니다. 아름다운 꽃은 훨씬 훗날의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물며 열매는 더 먼 미래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씨앗과 꽃과 열매의 인연 속 어디쯤 놓여 있는 것이지요. 고전의 아득한 미래가 바로 지금의 우리들일지도 모릅니다. 그 미래 역시 아직은 꽃이 아니라고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 신영복의 담론에서

 

위의 인용문은 신영복 선생 (다른 저자와 달리 이 분은 꼭 '선생'이라고 불러야 할 것만 같은...)의 책 '담론'의 앞 부분 고전강의의 마지막 단락에서 따온 것인데, 전체적으로는 앞 부분의 고전 강의보다 뒷 부분의 인간학이 훨씬 더 좋다. 감옥에서 온갖 사람들을 만나고 부대끼며 체득한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의 울림이 크다. 물론 앞 부분의 고전 강의도 그저 해설만이 아니라 저자 자신의 경험과 생각이 섞여 있지만, 고전 텍스트를 읽지 않고 강의를 듣는 격이어서 약간 몰입도가 떨어진다.

책을 읽으며 여러가지로 뜨끔한 대목들도 많았다. 다른 사람의 호의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살아왔던 태도라던가 뭐든 판단이 빠른 습성 때문에 망신살이 뻗쳤던 저자의 고백에 겹쳐 나 자신의 비슷한 실수들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도 나고.

 

요즘 나의 관심사와 겹쳐서인지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계속 마음에 남아 있는 대목은 개인과 관계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다. 신영복 선생은 자신을 개인적 존재로 인식하는 사고야 말로 근대성의 가장 어두운 면이라고까지 단언한다. 관계야말로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가장 본질적 요소라는 것이다. “관계야말로 궁극적 존재성이라고, “개인의 변화조차 개인을 단위로는 완성될 수 없다, 다른 글에서와 달리 단호한 어투로 말한다.

 

사람이 관계를 떠나 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좁은 분야에서나마 연대와 나눔의 가치를 현실로 만들려는 활동을 생업으로 삼은 최근 몇 년 간에도, 여전히 나는 스스로를 개인주의자로 생각해왔다. 여러 계기가 겹쳐서일 텐데 아마 들끓던 젊은 시절에 통과해온 집단주의적 문화의 흔적이 지긋지긋해서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도망친 면도 있을 테고, 또래의 보통 사람들처럼 가족, 특히 자식에 대한 책임과 의무에 포박되어 살아오지 않아서 더 그렇기도 할 것이다.

하여튼 제대로 숨쉬고 살기 위해 내게 필요한 혼자만의 (심리적인) 공간, 사람들로부터 떨어져야 하는 개인적 거리를 좀 크게 두며 살아왔다. 영화나 공연도 혼자 보고 여행도 혼자 해야 편안했다. 몇 년 전부터 사회운동의 유행처럼 회자되는 공동체라는 단어도 좀 깨림칙했다.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관계의 의무와 압박, 개인과 개인 사이의 비좁은 거리, 개인에 우선하는 집단의 존재를 상상만 해도 마음이 답답해졌다. 신영복 선생은 같은 키의 벼 포기가 그렇고 어깨동무하고 있는 잔디가 그렇듯”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자기 변화의 질과 높이의 상한(上限)”이라던데, 나는 내가 맺는 인간관계가 그렇게까지 내게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의 자기 변화는 주변의 영향과 무관하게 홀로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해왔는지도 모르겠다. 내게 가깝고 소중했던 관계를 하나씩 잃어가면서도 나이가 들어 완고해진 탓이라 생각하며 체념을 쌓아왔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몇 년 전부터 조금씩 흔들린다. 오랫동안 칼 융이 말한 자기’(self)의 실현을 중시해왔는데, 그렇게 생을 걸고 실현해야 할 진짜 나 자신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걸까 하는 의문이 점점 짙어진다. 내 안에 그런 게 있다면 단 하나의 참된 자기 (true self)가 아니라 때로 충돌하고 때로 조화로운 여러 개의 정체성이 있을 거다. 그리고 그 여러 개의 '나들'을 통해 겪은 경험들을 의미 있는 실로 꿰어 스스로 만들어내는 '자기 서사 (autobiographical narrative)'가 있을 테고.

사회적 역할에 따라 쓰게 된 가면 (persona)을 자기 자신과 혼동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가면들을 벗고 혼자 내면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내가 더 진실한 스스로를 발견하리라 기대할 근거는 없다. 어쩌면 어떤 역할도 없고 어떤 관계와의 상호작용도 없이 혼자일 때 떠올리는 나 자신은 일정 부분 허영이 빚어낸 자아상의 일면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신영복 선생이 단언한 것처럼 "관계가 인간의 궁극적 존재성"이라고까지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은 저항감이 있다. 흔쾌하지 않은 무언가가 승복하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상황과 관계에 실려 변화하는 유동적 존재임을 인정하는 한편 (허상일 뿐이라 해도) 단단한 중심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랄까.

'담론' 다음으로 읽는 책은 관계,공동체 대신 개인의 자유에 뿌리를 두고 사회적 변화를 이야기하는 책이어서 기대가 된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많아지면 좋을 텐데....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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