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리베카 솔닛.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에서----- "냉소주의는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포장하는 방식이다. 냉소주의자는 자신이 쉽사리 속지 않고 멍청하지 않다는 점을 무엇보다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내가 곧잘 접하는 냉소주의는 오히려 둘 다에 해당할 때가 많다. 염세적 경험을 자랑스러워하는 이들이 종종 순진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은 냉소주의자들이 실질보다 스타일을, 분석보다 태도를 앞세운다는 것을 말해준다.(...)단순화가 무언가를 그 본질로만 압축하는 일이라면, 지나친 단순화는 그 본질까지 내던지는 일이다. 지나친 단순화는 여간해서는 확실성과 명료성을 허락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쉼없이 그것들을 추구하는 일이고, 섬세한 뉘앙스와 복잡성을 명쾌한 이분법 속에 욱여넣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순진한 냉소주의..
“삶이 그런 것인데도 사람들은 종종 착각해요. 안정적인 삶, 평온한 삶이 되어야 그때 비로소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요. 이것은 착각입니다. ‘지금 사정이 여러모로 안 좋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이 일을, 혹은 공부를 할 수 없어. 나중에 좀 편안해지고 여유가 생기면 그때 본격적으로 할 거야’라고 하지만 그런 시간은 잘 오지 않아요. 아니 끝내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한동일의 ‘라틴어수업’을 읽다가 이 대목에서 갑자기 뭐라도 쓰고 싶어졌다. 내 정체성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 (오래 쓰든 안쓰든) 내게는 중요하(다고 오래 생각해왔)다. 아마 예전처럼 일 삼아 매일 쓰는 삶은 다시 살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그런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여유가 생기면 뭐라도 써야지 ..
봄밤 ---- 김수영 (1957)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폭력적 외상사건의 피해자가 겪는 수치심과 의심을 설명하면서) 수치심은 무력감, 신체적 안녕의 침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모욕에 대한 반응이다......외상 사건은 주도성에 훼방을 놓고, 개인의 능력을 제압한다....외상이 끝난 뒤 생존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비판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죄책감과 열등감은 실제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외상 사건의 후유증이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생존자가 스스로를 비난하는 사례를 설명하면서) 유사한 문제는 강간 생존자들의 치료에서도 표면화된다. 이들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렸다거나,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면서 쓰디쓰게 자책한다. 그러나 이는 정확히 피해자를 비난하고 강간을 정당화하려는 강간범의 논박과 일치하는 것이다. 생존자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꼭 하고 싶은 버킷 리스트 (bucket list) 중 하나는 내 ‘명예의 전당’에 모셔둔 몇몇 작가들의 전작(全作)을 다 읽는 일이다. 그 중의 한 명이 로맹 가리. 오래 전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으로 처음 만났고 자서전적 소설인 『새벽의 약속』에 매혹된 뒤 그의 소설들을 계속 찾아 읽는 중이다. 이번에 읽은 소설은 공쿠르상을 탄 『하늘의 뿌리』였다. 로맹 가리만큼 세상사의 아이러니, 사람의 표변과 이중성, 이념과 믿음의 무가치함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때론 냉소 또는 혐오를 드러내면서도 결국 사람에 대한 대책 없는 애정을 버리지 못하는 작가도 찾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 그가 그려낸 사람들은 나치 강제수용소에 갇혀 모든 것을 빼앗길지언정, 하다못해 땅바닥에서 뒤..
아침에 신문에서 본 시인 김소연의 이 글이 너무 좋아서, 자주자주 보려고 링크 걸어놓는다. 시행착오일 게 뻔한 인생이라 이 글에서 위로를 얻는 건가....아무튼 적어도 "새로운 시행착오, 겪어본 적 없는 낭패감", 그리고 시인의 말마따나 비루함과 지루함, 낭패감, 드물게 찾아오는 지극함 등이 골고루 섞인 경험은 열심히 겪고 있으니! "어쩌면 인생 전체가 이런 시행착오로만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싶다. 죽는 날까지 경험할 필요 없는 일들만을 경험하며 살다가 인생 자체를 낭비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을지라도, 커다란 후회는 안 해야겠다 생각한다. 수많은 인생 중에 시행착오뿐인 인생도 있을 테고, 하필 그게 내 인생일 뿐이었다고 여길 수 있었으면 한다. 대신, 같은 실수가 아닌 다른 실수, 같은 시행착오가 아닌..
제일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원더풀 라이프’를 만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에세이. 하루키의 에세이나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언뜻언뜻 연상시키는 대목들. 독특한 일본풍같은 게 있달까. 목소리 높이지 않고 자분자분한 말투로, 심각해지지 않고 경쾌하면서도 그냥 휙 지나치지는 않는 찬찬한 시선 같은 것.일테면 감독이 ‘사람은 상중에도 창조적일 수 있다’는 어느 책의 구절을 읽으며 떠올렸던 촬영의 경험. 나가노 현의 한 초등학교를 3년에 걸쳐 취재했는데, 한 학급의 아이들이 송아지를 키워 교배를 시키고 젖을 짠다는 목표를 세우고 3학년 때부터 계속 송아지를 돌봐왔더란다. 그러나 5학년 3학기가 시작되기 조금 전, 예정일보다 빨리 어미소가 조산해버렸다. 울면서 송아지의 장례식을 마친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
의도했던 것은 아닌데 새해 읽은 첫 책은 ‘몸의 일기’, 다음은 ‘마음의 시계’다.사두고 읽지 않은 책들을 모아둔 서가 앞에서 서성이다 ‘몸의 일기’를 고른 건 그야말로 ‘생존체력’을 키우는 게 절실하단 걸 느끼던 때였고, 붕붕 뜨는 정신을 끌어내려 단단히 몸에 결박하고 싶단 생각을 하던 때라서 그랬는지도...자꾸 변하기 마련인 정신을 관찰하는 내면 일기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현하며, 오직 몸의 상태, 변화만을 관찰하여 기록하겠다는 다짐 하에 쓰여진 일기(를 가장한 소설). 그런데도 한 사람의 일생의 변천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방귀 냄새, 성기 모양까지 자세히 기록한 몽테뉴의 “에쎄”를 떠올리게 하는 세밀한 기록. 한탄과 자기혐오, 느닷없는 반성과 후회 따위로 얼룩진 일기 (조차도 써본지 오래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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