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파리의 식당과 공연장에서 동시다발테러가 일어나고 서울 한복판에서 농민의 몸 위에 물대포가 쏟아지던 날 즈음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무차별 총기난사 테러로 미국이 들끓고 있다. ‘어제의 세계’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은 작가의 자서전이지만, 그가 묘사한 이성의 패배와 야만성의 승리는 그저 ‘어제’의 일로만 읽히지 않았다. 인류가 숱한 문명을 거듭하고 무수한 희생을 치르며 쌓아올린 자유와 공존, 존엄의 가치가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음을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목격하고 있으니까. 지금은 전기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전기와 희곡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작가였던 슈테판 츠바이크는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브라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
웹툰을 드라마로 옮긴 ‘송곳’의 방영이 끝나는 날마다 소셜미디어에는 노동상담소장으로 나오는 구고신의 명대사를 옮긴 글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라온다. 구고신의 명대사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이라는 무서운(?!) 제목의 책을 쓴 미국의 노동운동가 사울 알린스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해서 널리 알려졌던 이 운동가도 21세기 한국에 있었다면 구고신처럼 말했을 것 같다. 이를테면 이런 대사.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 안 들어. 좋은 사람 말 듣지.” 옳은 말을 하면 사람들이 따를 거라는 기대는 얼마나 순진한가. 누구나 자기 경험에 비추어 세상을 본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당위만 주장할 게 아니라 상대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고 상대의 가치관을 존중하며..
돌이켜보면 제자백가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상앙, 이사와 같이 천하 통일을 이끈 사람의 삶도 결국 비극으로 끝납니다.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룬 것이 많을 수 없습니다. 꼬리를 적신 여우들입니다. 그 실패 때문에 끊임없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자위합니다. 한비자의 졸성 (拙誠)이 그런 것이라 하겠습니다. 졸렬하지만 성실한 삶, 그것은 언젠가는 피는 꽃입니다.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한 말입니다. '땅을 갈고 파헤치면 모든 땅들은 상처받고 아파한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 피우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사실입니다. 아름다운 꽃은 훨씬 훗날의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하물며 열매는 더 먼 미래의..
요즘 매일 읽는 오에 겐자부로의 글. 성급히 뛰어내려 다가갔다가 화가 나서 떠나버리는 부인보다, 자기가 할 일을 찾아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소녀의 방식을 기억하기 위해. (지적 장애를 지닌 42살 장남 히카리가 보행훈련을 하다가 넘어진 뒤 오에 겐자부로가 자신보다 훨씬 무거운 아들을 안아 올리느라 애쓰던 상황을 설명한 뒤) "자전거를 타고 온 나이 지긋한 부인이 뛰어내리더니 "괜찮아요?"하고 말을 걸면서 히카리의 몸에 손을 댔습니다. 히카리가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은, 낯선 사람이 자기 몸을 건드리는 것과 개가 자기를 보고 짖는 것입니다. 이럴 때 저는 자신이 에부수수한 노인이라는 것을 알지만,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어 달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화가 난 채 가버린 후, 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백만년만에 쓴 서평. (프레시안에 실린 '주변은 온통 장미 꽃밭, 우리는 그 사이의 오물" 바로가기) 북콘서트도 했었고 재미있게 읽은 "안나와디의 아이들"에 대해 썼다. 쓰면서 느낀 점. 글 쓰고 사는 사람들, 대다나다....... (어느새 이렇게 되었구나 ㅠ) ---------------------------------------------------------------------------------------------------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되 진실도 말하지 않는다.” 사실의 기록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라면 전언자(傳言者)들의 수호신인 헤르메스의 서약을 곰곰이 생각해볼만하다. 쓰는 사람은 사실의 낯섦을 유지하되 이를 익숙한 형태로 바꾸어 읽는 이에게 제시해야 한다는 딜레마를 안고..
“내가 살면서 고수한 한 가지 원칙은 ‘아니오’라고 대답해야 할 명백한 이유가 없는 한 ‘네’라고 대답하는 거야. 내 삶에 ‘아니오’라는 대답은 없었다네. 나는 내게 주어진 일들을 흔쾌히 받아들였지.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하다 보면 흥미가 생기는 경우가 많았어 ...(중략)... ‘새로운 일은 하고 싶지 않은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삶은 지루해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망설여서는 안 된다네. 나 역시 내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받아들였던 일들을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네. 누구든 새로운 일을 통해 또 다른 무언가를 배울 수 있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보상받을 수도 있어. ‘아뇨. 못하겠는데요.’ 혹은 ‘하고 싶지 않은데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은 것들을 놓치기 마련이지. 삶은 모험이야. 모험을..
"나는 가난한 수백 가구를 먹여 살렸죠. 그러나 언제나 먼저 내가 돕는 가난한 이들이 내 마음에 드는 얼굴들인지 보러 갔죠. 선의를 가진 남자들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절대적인 것을 찾는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척하며 잡아먹는 다른 여자, 그러니까 이름도 없고 얼굴도 온기도 없는 추상적인 인류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이게 사실이라면 인류는 정말이지 여성형이 맞을 거예요. 이 사치에는 견유주의가 아니라 꽤 많은 양의 허무주의가 들어 있는 것 같아요." - 로맹 가리의 '레이디L'에서 - 레이디L이 연적으로 삼은 '다른 여자'는 '얼굴 없는 추상적인 인류'다. 인류애 넘치는 아나키스트 연인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는 데에 실패한 레이디L은 인류를 '다른 여자'라고 불러 자기 나름의 방식으..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고 무관심 때문에 거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주된 죄가 단 한 가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초조함일 것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추방되었고, 초조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카프카, 고병권의 글 '초조함은 죄다' (바로가기)에서 재인용) 이틀 내내 아무 할 일 없는 시간을 맘껏 즐기다 밤에 읽은 고병권의 글 '초조함은 죄다'에서 눈에 띈 대목. 어제 빈둥거리다 되는대로 손에 잡힌 소포클레스 전집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과도 겹친다. '오이디푸스 왕'을 오래 전에 읽을 땐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비극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제 다시 읽으니 다른 점들이 계속 눈에 띄었다. 이를테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거라는 저주를 받았다고 그 즉시 왜 아이를 갖다 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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