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인, 딱 이 느낌으로 '봄이라고 하자'도 하나 써주었으면 좋겠다. 며칠전에 핀 목련이 벌써 꽃잎을 흩뿌리며 수런대는 봄밤. 다 사라지기 전에. ------------------------------------ 가을이라고 하자/ 민구 지음 그는 성벽을 뛰어넘어 공주의 복사꽃 치마를 벗긴 전공으로 계곡타임즈 1면에 대서특필됐다 도화국 왕은 그녀를 밖으로 내쫓고 문을 내걸었다 지나가던 삼신할미가 밭에 고추를 매달아놓으니 저 복숭아는 그럼 누구의 아이냐? 옥수수들이 수군대는 거였다 어제는 감나무 은행이 털렸다 목격자인 도랑의 증언에 의하면 어제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원래, 기억이란 게 하루 사이에 흘러가기도 하는 거 아니냐며, 조사 나온 잠자리에게 도리어 씩씩 대는 거였다 룸살롱의 장미가 봤다고 하고 꼿꼿하..
내 젊은 날의 숲 - 김훈 지음/문학동네 언젠가 가족 모임에서 아버지에게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물은 적이 있다. 늘 그렇듯 “다시 태어나도 너희들의 아버지로 살지”처럼 식상한 대답을 또 하시겠거니 했는데,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신부가 되었으면 좋겄다. 부양할 가족도 없고 오로지 자기 믿음대로 살 수 있으니 얼마나 좋냐…” 그때 아버지의 쓸쓸한 표정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가장으로 살아온 그 세월, 숫기도 없고 서생으로 살았더라면 딱 좋았을 분이 빈손으로 사업을 시작해 필사적으로 버텨온 그 긴 시간이 얼마나 고달팠으면…. 요즘도 점점 굽어가는 아버지의 등을 볼 때면 다음 생에선 신부가 되고 싶다 하시던 쓸쓸한 표정이 생각나서, 나는 자주 목이 멘다. 김훈의 소설 ‘내 젊은 날의 ..
자기 전에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골라 펼쳐보는 오래된 버릇. 재미없는 책이 걸리면 일찍 자고, 다시 봐도 재밌는 책이 걸리면 또 읽는다. 오늘 걸린 책은 "죽은 철학자들의 서"(사이먼 크리칠리, 이마고 2009). 철학자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모아 쓴 책인데 이게 재미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건성건성 책장을 넘기다 아래 대목을 만남. 처음 읽을 때도 웃겼던지 끝 부분에 내가 ^^ 표시를 해놓았던데 그걸 까먹다니. 조발성 치매가 왔나. 좌우간 요즘은 정말 웃긴 책이 좋아~ 메트로클레스 Metrocles 기원전 3세기 일설에 따르면 그는 연설을 연습하던 도중 방귀를 뀌고 말았다. 너무 부끄러워 절망한 그는 죽기로 작정하고 밥을 굶었다. 크라테스 (디오게네스의 제자로 견유학파의 인물인데, 견..
"사랑하는 능력과 달리는 능력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비질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원리는 명백하다. 이 둘은 욕망을 따르려는 마음을 완화시켜주고, 원하는 것을 한쪽에 밀어놓고 가진 것에 감사하고 인내하고 용서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도록 해준다. 사랑과 속도는 대부분 공생관계에 있으며 우리의 DNA 가닥들만큼이나 서로 닮았다. 우리는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달리기 없이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통달하게 되면 다른 쪽도 통달하게 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 크리스토퍼 맥두걸의 '본 투 런' 중에서 - - 달리기에 대해 내가 읽은 것 중 최고의 찬가. 무릎 부상으로 은퇴(씩이나! 얼씨구~) 하였으나 왕년에 러너 (음....하프 마라토너에..
저는 제 가치의 리스트에서 '친절함'을 제일로 꼽고 싶습니다. 몇 년 전 한 러시아 작가가 세계2차 대전의 소련에 대해 쓴 소설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 어느 한 지점에서 작가는 어떤 인물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실제로, 사회체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있어. 사회주의나 자본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 (...) 이어서 그가 던진 말은 "우리 삶에서는 친절함이 전부"라는 것이었습니다. (...) 친절함, 관대함, 착함, 타인에 대한 감수성,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 세계를 보는 것. 때로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이게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야'라고 말이죠. 하지만 당신은 타인이 그 문제를 어떻게 보는 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역시 ‘책과 사람’의 연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만, 초등학교 5학년 후반부터 도서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한 것입니다. 도서위원이 되어보니 도서실의 열람 카드에 적혀 있는 이력을 볼 수 있게 되었지요. 열람 카드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한 권의 책을 여러 사람이 여러 시기에 읽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책을 읽은 날짜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해가 1956년이니까, 그 이전 40년대의 학생들, 더 올라가 전쟁 중의 학생들, 아니 전쟁 전의 학생들 기록까지 전부 남아있었지요. 1941년 6월12일 《에밀과 탐정들》,1932년 3월4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기록이 거기 남아 있었어요. 필적까지 그대로 말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신기했어요...
".....우리 테이블에는 최근 대학을 졸업한 젊은 여성도 있었는데 중미의 촌락민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간호학교에 막 입학한 이였다. 그녀가 부러웠다. 사회에 대한 기여가 너무 간접적이고 불확실한, 글을 쓰거나 가르치고 법을 업으로 삼고 설교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나는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이들에 관해 생각했다. 자기 손으로 무엇이든 쓸모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빗자루 하나라도 만들고 싶다는 평생의 바람에 대해 시를 쓴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나는 떠올렸다.” -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서 - 오랫동안 내팽겨쳐 둔 세 번째 책을 위해 사람들을 인터뷰하러 돌아다니고 원고를 쓰는 중이다. 얼마 전에 만났던 한 여성의 말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말을 다루는 일..
영감이란 일반적으로 예술가 혹은 시인만의 특권은 아닙니다. 영감을 받은 사람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며, 과거에도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뚜렷한 신념으로 자신의 일을 선택하고, 애정과 상상력을 갖고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 …… 영감, 그게 무엇이든 끊임없이 “나는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가운데 생겨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사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생계 수단으로 일을 합니다. 혹은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일을 합니다. 스스로의 열정으로 일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삶의 조건들이 그들을 대신해 선택을 내리곤 합니다. 좋아하지 않는 일,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일, 그나마 그런 일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기에 어쩔 수 없이 가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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