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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재

내 젊은 날의 숲

sanna 2010. 12. 13. 01:31

내 젊은 날의 숲 - 8점
김훈 지음/문학동네

언젠가 가족 모임에서 아버지에게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물은 적이 있다. 늘 그렇듯 “다시 태어나도 너희들의 아버지로 살지”처럼 식상한 대답을 또 하시겠거니 했는데,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신부가 되었으면 좋겄다. 부양할 가족도 없고 오로지 자기 믿음대로 살 수 있으니 얼마나 좋냐…”

그때 아버지의 쓸쓸한 표정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가장으로 살아온 그 세월, 숫기도 없고 서생으로 살았더라면 딱 좋았을 분이 빈손으로 사업을 시작해 필사적으로 버텨온 그 긴 시간이 얼마나 고달팠으면…. 요즘도 점점 굽어가는 아버지의 등을 볼 때면 다음 생에선 신부가 되고 싶다 하시던 쓸쓸한 표정이 생각나서, 나는 자주 목이 멘다.

김훈의 소설 ‘내 젊은 날의 숲’을 읽을 때, 29살의 여자가 주인공인데도 자꾸만 내 머릿속엔 그런 아버지가 떠올랐다. ‘가족들의 생리적 삶’을 지키기 위해 ‘빼도 박도 못할 운명’을 살아낼 수밖에 없었던 내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들…. 

하지만 삶을 형성하면서도 동시에 헝클어뜨리는 질긴 인연이 옥죄는 대상이 어디 가장 뿐이기만 할까. 가족은 구성원 모두에게 가장 절실한 동시에 가장 숨 막히는 관계다. 주인공은 옛사람들이 효(孝)를 그토록 힘주어 말한 까닭도 “점지된 자리를 버리고 낳은 줄을 끊어내려는 충동이 사람들 마음속에 숨어 불끈거리고 있는 운명을 보아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상상한다.

여성성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주인공의 말들은 다른 글들에서 이미 익숙해진 김훈의 목소리와 닮았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하는’ 삶의 아득함에 질려하면서도 그저 묵묵히 살아내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그것 말고 다른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고 묻는 비장한 저음의 목소리는 이 소설에서도 여전하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 소설에선 처음에 서로에게 삼인칭이던 사람들이 ‘쓸데없는 말이라도 다급하게 하고 싶어지는 충동’을 느끼면서 이인칭으로 다가가려는 안간힘이 비중있게 묘사되고 있다는 것. 소설 속에서 꽃의 세밀화를 그리는 주인공, 발굴된 뼈의 그림을 의뢰하는 김중위는 그렇게 느리고 희미하게 서로에게 다가간다. 다른 글들에서 엄한 얼굴로 ‘산다는 건 치욕을 감수하는 일’이라고 줄곧 말해오던 작가는 이 소설에선 질긴 인연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인연을 향해 다가가며 덧없는 세상에 '한 뼘의 근거지'를 만들려는 사람들의 몸짓을 오래 바라본다.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사랑을 그리려던 작가가 끝내 뚜렷한 형상을 내놓지 않은 까닭은 그것이 ‘말하여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 말할 수 없고 가닿을 수 없음은 소설 속에서 꽃의 색채와 긴장을 그림으로 묘사하려고 시도하다 번번이 좌절하는 주인공의 안간힘과 겹쳐진다. 하지만 어떨땐 말하여지지 않는 것들이 더 명료하다. 어떤 페이지에서 저자는 이렇게 썼다.

"패랭이꽃 이파리는 단순하고 또 명료하다. 그것들은 군더더기가 없고, 이 세상에서 부지런하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들만으로 가지런하다."

너무 희미하여 제대로 말하여질 수 없을지언정, 그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들’에 작가는 ‘사랑’을 넣는 것이로구나...어느 인터뷰에선가 이 적막하고 쓸쓸한 글을 두고 “연애 소설을 썼다”고 말하던 김훈의 설명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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