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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의 감옥 - 10점
이건범 지음/상상너머

지금 들으면 넋 나간 소리 같지만, 한 때 나는 학생운동을 하다 붙잡혀 징역을 산 '빵잽이'(전과자를 부르던 속어)에 대한 기묘한 열등감에 시달린 적이 있다. 이 책의 저자 말대로 80년대 학생운동에 뛰어든 20대에게 징역은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낙인을 찍고 존재를 갈아타는 환승역"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게도 그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이 뒤꽁무니에 붙어 다녔는데, 어찌어찌 별 탈 없이 20대를 넘겼다. 기득권을 포기하지도 않았지만, 고 채광석 시인의 말마따나 '앓아 누운 사람들 사이에 따라 누워 신음 소리만 흉내 내다' 말았다는 죄책감과 열등감도 오래 잊히지 않았다.

저자는 그처럼 내가 경외를 품고 바라보던 '빵잽이'였다. 저자 이력을 보면 경외감은 더 커진다. 혁명을 꿈꾸다 두 번의 옥살이를 한 뒤 창업하여 연 매출 100억 원 대의 기업을 일궜으나 12년 뒤 쫄딱 망했다. 눈이 나빠져 1급 시각장애인이 되었는데도 지난해 600쪽 넘는 '좌우파사전'을 펴내고 한국출판문화상을 탔다. 그런 사람이 쓴 '내 청춘의 감옥'이라......인간 승리의 비장한 이야기일까?


웬걸, 신세 망쳤다는 영탄이 뒤덮어도 시원찮을 감옥이 배경인데 이 책엔 '변형 바이러스'같은 웃음이 넘쳐난다. 저자는 엄숙한 정치범 사동에서 스포츠지 구독을 시작으로 물을 흐리더니, 잡생각을 물리친답시고 '수학의 정석'을 풀던 '범생'과 급기야 지루박 스텝을 밟는가 하면, 요리법 개발 경쟁을 벌이다가도 만두를 빚어 교도관까지 한 밥상에 둘러앉아 조촐한 한 끼를 같이 먹는다. 저자가 그 안에서 칼을 만들지 않나, 종이로 문짝과 빗장까지 달린 장롱, 선반, 책상을 만드는 장면에 이르면 감탄이 절로 난다.
상상력을 발휘해 징역의 칙칙함을 벗겨내고 끊임없이 사람들과 함께 웃을거리를 찾아내던 저자의 징역살이를 키득거리며 읽다 보니, 묘하게 요즘 청춘들, 무슨 '투쟁'이니 하는 살벌한 단어 아래에서도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춤추며 놀 줄 아는 아이들이 머릿속에 오버랩 됐다. 그렇지......쇠창살보다 더한 그 무엇으로도 완전히 가둘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웃음. 그게 청춘이지.

그렇다고 설마 20대에 치른 두 번의 옥살이가 마냥 가볍기만 할까. 하고 싶은 일은 떠올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살아야 할 삶' 10년 청춘을 걸었는데, '동지'들은 떠나갔고 저자는 1.4평 안에 갇혔다. 증오와 고통은 가장 먼저 자신의 표정부터 일그러뜨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저자는 떠난 이들을 미워하던 자기 마음의 밑바닥부터 직시하는 힘겨운 작업을 비켜가지 않았다. 흰 벽을 바라보며 홀로 목놓아 울던 숱한 시간을 보낸 뒤, 저자는 "고통을 끌어안는 법", 남에 대한 미움 또는 자책으로 치닫지 않고 고통을 그 자체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담담한 어조로 들려준다. 만만치 않은 고난을 겪었으면서 "삶이 나날이 흥미롭고 즐겁다"고 말하는 저자의 힘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유쾌하면서도 때론 울컥해지는 책을 덮으며 저자가 보여준 웃음의 힘을 다시 떠올려 본다. 불친절한 운명을 원망하는 대신 가볍게 웃으며 세상을 통과하기, "세상은 대부분 고통스럽고 행복은 아주 짧게 스쳐갈 뿐"이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은밀하고 뜨겁게 꿈틀거리며 강한 힘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가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그 짧은 행복의 기억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그리고 계속 웃기. 그가 감옥에서 배웠듯 "웃음의 가벼움이야말로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므로.

그나저나 다 읽고 나니, 오래 전에 잊었던 '빵잽이'에 대한 열등감이 다시 살아난다. , 이렇게 재미있는 경험인 줄 그 때도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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