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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재

나의 서양음악순례

sanna 2013. 3. 3. 23:50

모처럼의 연휴에 심하게 앓았다. 꼼짝 못하고 드러누워 계속 비몽사몽. 정신이 혼곤한 와중에 잠깐씩 깰 때마다 스마트폰으로 트위터도 보고 책도 들췄는데, 사람들의 봄 나들이 자랑불타버린 대한문 앞 쌍차 분향소, 책 속의 아름답고 비통한 이미지들이 마구 뒤섞여 꿈속으로 몰려들어왔다. 깨어 있는 상태와 꿈 속이 분간이 안 될 지경....

 

그렇게 읽은 책이 서경식의 '나의 서양음악순례'. 내가 좀비 같은 상태여서 제대로 읽었는지나 의심스럽고, 클래식에 문외한이지만, 참 좋은 책 (이렇게 말하려니 좀 황당하긴 하다..). 

의도한 건 아닌데 10여 년에 걸쳐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 '나의 서양미술순례', '나의 서양음악순례'를 다 읽게 됐다. 세 권의 책을 늘어놓으면 섬세한 내면, 다소 우울한 감수성을 지닌 빼어난 문장가가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를 거쳐가는 생의 행로를 보는 듯도 하다.

 

꿈 속에까지 밀려 들어온 책 속의 강렬한 이미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여성 수인 오케스트라에서 음악을 연주해야 했던 한 유대인 여성의 고백.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벌거벗은 사람들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행위가 '인간성의 최종적 파괴'라고 그녀는 치를 떨며 저항했지만 '오케스트라냐 징벌노동이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수용소 당국의 강요 앞에서 그녀는 결국 오케스트라를 택하고 만다. "그 때 나는 패배한 겁니다"라고 그녀는 80세가 되어 고백한다......

 

책 속에 비극적 이야기들만 있는 건 아니다. 서경식과 성향이 전혀 다른 아내 F의 음악적 취향의 차이도 소소하게 재미있고, 10년 넘도록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참석해온 경험담, 윤이상, 말러, 슈베르트에 대한 이야기들도 재미있었다. KBS FM 93.1에서 장일범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 책에도 장일범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깜짝 놀라기도 했다.

 

....에고~ 독후감을 길게 쓸 기운도 없다. ㅠ.ㅠ 다만, 서경식이 책 말미에 다루지 못해 아쉬운 음악가로 꼽으며 소개한 리히터의 1977년 영국 앨드버러 공연 장면 (일본 NHK 방송)을 유튜브에서 찾아 뿌듯하다. 서경식은 이 연주를 두고 '첫 화음이 울려퍼지자마자 경이롭다'고 썼는데, 그보다 나는 뭐랄까, 나를 알아봐주는 상대를 만난 듯 맘이 안도감으로 착 가라앉는 기분. 

지난해 앙코르와트에서 후배가 들려준 리히터, 그리고 요즘 내가 꽂혀 있는 슈베르트. 두 거장이 만난 곡을 서경식의 책에서 발견하니, 몇 겹의 우연이 겹쳐 만난 Serendipity처럼 혼자 흡족하여 음악을 듣고 또 듣고 하다가 더 자주 들으려고 여기 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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