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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원제 (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보다 번역제목과 부제 (비통한 자를 위한 정치학 -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가 훨씬 좋다.

게다가 비통, 민주주의, 마음...대선 이후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키워드들이 아닌가. 대선 전에 한 번 읽은 책이지만, 대선 이후 마음이 요동칠 때 이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왜 그렇게 마음이 심란했을까. 평소에 별 관심 없던 정치가 왜 나의 일상적 감정에 그토록 큰 영향을 끼친 걸까. 개인적으로는 대선 다음날 내가 작은 사고를 쳤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선 결과로 뭐라 말할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오른 상태에서 회의에 갔다가, 나보다 연배가 한참 높은 분과 언쟁 끝에 그에게 아주 거칠게 대했다. 그 분 의견이 말도 안 되게 들려 열이 오르기도 했지만, 새누리당을 찍었을 거란 짐작 때문에 내 태도가 더 적대적이었던 듯하다어색하게 수습한 뒤 며칠 후, 그 분이 나를 따로 불러 말했다. "상대가 악당도 아닌데 무조건 틀렸다고 단정하고, 약한 고리를 콕 찍어 후벼 파는 식으로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

 

황망했다. 잔뜩 모가 난 내 마음이 갑자기 내 밖의 어떤 거칠고 흉한 물질로 외화되어 눈 앞에 들이밀어지는 듯했다. 이 책의 표현대로라면, 비통한 마음 (brokenhearted)이 부서져 열리는 (broken open) 대신 부서져 흩어져 버린 (broken apart) 상태, 그 바람에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마구 파편을 튀기는 그런 상태인 것만 같았다.

저자인 파커 파머는 "'우리' '너희'를 흑백의 구도로 나누고 싶은 마음을 물리치고,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너그러움의 여백이 있어야 민주주의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창조적으로 긴장을 끌어안는 마음의 습관을 일상에서, 내 일터와 가족, 동네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다른 어디에서도 배우기 어려울 것이다...

 

부서져 마음이 열리는 (broken open) 상태는 갑자기 포용력이 확 커지는 게 아니라 이전에 보지 못했던 (않았던) 것들을 보려는 노력에서 시작될 터이다. 대선과 작은 사고 이후 체념과 수치심으로 마음을 닫는 대신, 갈등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을 따르려 노력해본다. 모순과 부조리는 바깥의 현실에만 있지 않았다. 이런저런 경험 때문에 내 안에 질기게 남아 있는 옳고 그름에 대한 편협함, 어줍짢은 엘리트주의, 어처구니 없게도 스스로를 선의 편에 동일시하는 도덕적 우월감 등등..... 차이와 다양성의 인정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지만, 솔직히 내가 마음 깊은 곳에서 그걸 인정하는지...그렇다고 단언할 수 없다.

 

저자는 차이의 인정이 관용이나 매너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차이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거라고 강조한다. 머릿속에서야 어렵겠는가. 문제는 실제 현실과 일상생활에서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이다. 저자는 낯선 이를 환대하는 공간을 물리적으로 회복하는 것의 필요성, 공적인 삶과 시민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깊이 공감하지만 개인으로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는 좀 막막하다.

 

이 책을 읽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아주 사적인 나 자신의 일에서부터 대선 결과처럼 커다란 정치적 사건 사이를 마구 오간다. 저자가 '마음'을 개인 삶의 차원과 공적인 영역, 역사 등 다양한 배경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가 '비극적 간극' 속에서 희망을 갖자고 말할 때, 이는 개인의 삶에서 "내 안의 황금과 찌꺼기 둘 다를 직시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고, 공적인 삶에서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기 위해 노력 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게 개인적 삶과 정치적 삶을 분리하지 않는 저자의 시각이 이 책의 미덕인 동시에, 한계처럼 보인다. 다 좋은 말이지만 현실에선 별 힘을 갖기 어려워보이는 모호함이 책을 읽는 내내 계속 마음에 걸린다. 개인이 내면의 모순, 바깥의 차이를 인정하고 자기가 속한 곳에서 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을 게을리 않는다면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세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이건 너무 순진한 기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떨칠 수 없다.... 어쩌면 읽는 내가 여전히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애매함과 긴장을 불편해하는 고질적 태도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답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답이 보이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말라는 게 저자의 조언이다. "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생애 안에 성취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쓸쓸한 사실이지만, 그건 그럴 것이다. 지난 한 해동안 김상봉 교수가 어디엔가 쓴 말을 수첩 맨 앞 페이지에 적어두고 종종 들여다 보았었다.

"추수에 대한 희망 없이 씨앗을 뿌리기, 희망 없이 인간을 사랑하기,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세계에 대한 의무를 다 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러한 비극적인 세계관 속에서도 언제나 기뻐하는 법을 배우기"

그런 세계관으로 내가 사는 세상을 바라본다면, 사실 크게 달라진 것도 없지 않은가....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큰 힘은 나지 않는다. 뭘 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는다. 다만, 부서져 흩어져 사방으로 파편을 날리는 내 마음을 그러모아야 하겠다는 생각은 든다. 당장 선명한 답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차이, 갈등 앞에서 마음을 닫지 말자고 다짐해본다. 그런다고 아무 것도 달라지진 않겠지만, 내가 속한 세상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것으로, 내겐 충분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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