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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재

안나와디의 아이들

sanna 2013. 11. 5. 00:00

백만년만에 쓴 서평. (프레시안에 실린 '주변은 온통 장미 꽃밭, 우리는 그 사이의 오물" 바로가기)

북콘서트도 했었고 재미있게 읽은 "안나와디의 아이들"에 대해 썼다.

쓰면서 느낀 점.

글 쓰고 사는 사람들, 대다나다....... (어느새 이렇게 되었구나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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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되 진실도 말하지 않는다.”

사실의 기록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라면 전언자(傳言者)들의 수호신인 헤르메스의 서약을 곰곰이 생각해볼만하다. 쓰는 사람은 사실의 낯섦을 유지하되 이를 익숙한 형태로 바꾸어 읽는 이에게 제시해야 한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쓴다는 행위에는 특정한 사실을 버리거나 강조하는 취사선택이 불가피하게 수반된다. ‘진실’도 배제와 레토릭이라는 강력한 ‘거짓말’에 의해 구축되는 숙명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논픽션을 순전히 사실의 기록이라 말할 수 있을까. 되레 부분적 진실들을 재료로 쓴 픽션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인도 뭄바이 공항 근처 슬럼가의 삶을 그린 논픽션 <안나와디의 아이들>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질문이었다. 책 앞뒤표지 소개 문구를 통해 독자는 이 책이 논픽션임을 미리 알고 읽을 수밖에 없는데, 안타깝게도 스포일러를 미리 알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처럼 놀라움 하나를 싱겁게 잃어버리는 것이다. 논픽션임을 모른 채 읽는다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인 이 책을 소설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묘사와 절묘한 비유를 읽다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 전지적 작가 시점의 수려한 글. <안나와디의 아이들>을 돋보이게 하는 동시에 읽는 이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안나와디의 아이들>은 가장 빠르게 성장하면서도 가장 불평등한 도시 중 하나로 꼽히는 인도 뭄바이의 슬럼가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 다투던 중 한 여성이 숨진 사건을 소재로 했다. 어찌 보면 토막 뉴스로 흘려버릴 수도 있는 사건의 관련자들과 숨은 맥락을 무려 4년간 꼼꼼히 취재해 성장의 그늘에서 깊어가는 가난에 대해 쓴 책이다.


논픽션으로서는 드물게 전지적 작가시점을 취한 건 저자의 치밀한 취재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예컨대 이웃집 여인인 파티마의 분신자살 사건은 저자가 168명을 반복적으로 인터뷰하고 경찰, 병원의 자료를 참고하여 재구성했다고 한다. 본문에서 누군가의 생각으로 묘사된 부분은 당사자가 자기 심정을 저자와 통역자, 또는 동행인에게 토로한 내용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쓰기 방식이 당혹스러워 처음엔 책 읽는 진도도 잘 나갈 수 없었다는 걸 고백해야 하겠다. 저자가 슬럼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한 전지적 시점의 글쓰기 방식이 마치 모든 걸 다 안다는 권위적 태도처럼 느껴져 불편했다. 가난한 가족을 오래 관찰하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쓴 조은 교수의 <사당동 더하기 25>에 나오는 에피소드가 저절로 떠올랐다. 연구자가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니 상대방이 “장점이 뭐예요?”하고 되묻던 장면. 살면서 장점을 생각하거나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던 가난한 이에게 장점이란 단어는 뜻 모를 외국어나 마찬가지였던 거다. 또 이런 경우도 있다. 가난한 사람과의 인터뷰 녹취를 풀던 대학생이 “지금 일자리를 잃으면 사흘간 놀아야 한다”는 말에서 사흘을 석 달로 고쳐 적었다고 한다. 사흘간 노는 건 대수롭지 않으므로 아마 석 달을 잘못 말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다. 그러나 실제로 가난한 이에게 사흘간 놀아서 수입이 없는 것은 중대한 문제였다.


불평등의 골이 깊어가면서 모국어로 말을 주고받아도 우리는 이처럼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같은 언어를 써도 이럴진대 <안나와디의 아이들>에서 미국의 백인 중산층 지식인인 저자는 통역을 거쳐 이해한 말들의 뜻과 맥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했을까. 나는 책에서 말해주지 않는 그런 점들이 궁금하고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어림짐작하느라 처음엔 애를 먹었다. 오스카 루이스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일인칭 시점에서 서술한 <산체스네 아이들>도 사실의 왜곡과 허구 논란에 휘말렸던 점을 생각하면, <안나와디의 아이들>은 매우 과감한 서술 방식을 택한 셈이다. 저자는 후기에서 자신의 글을 ‘관찰기록’이라 부르고 모든 게 사실임을 강조했지만, 어찌 보면 <산체스네 아이들>같은 관찰기라기보다 트루먼 커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처럼 논픽션 소설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안나와디의 아이들>은 서술방식에 불편함을 느낄 때조차도 그러한 글쓰기에 감탄하게 만드는 책이다. 글쓴이와 서술방식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바로 본문으로 진입할 수 있는 독자라면, 슬럼가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민낯을 묘사한 치밀함에 놀라게 될 것이다. 나도 이 책을 두 번째 읽으면서 비로소 저자가 보여주고자 했던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실 저자가 논픽션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글을 썼더라도 그것이 온전히 객관적인 기술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객관적 글쓰기가 가능하기나 하겠는가. 쓰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모자이크 퍼즐을 맞추듯 부분적인 사실들의 끊임없는 조합을 통해 전체의 상을 그려나가는 시도, 어떤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숨은 의미’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끊임없는 시도밖에 없을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안나와디의 아이들>은 가난의 어제, 오늘,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매우 탁월한 시도이다.


책을 읽다보면 어디서나 가난의 얼굴이 비슷하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 압축성장의 과정에서 농촌을 떠난 이주민들이 도시 빈민이 되는 흐름은 한국의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주인공인 압둘은 고물을 분류해 살아가는 소년인데 서구 발 불황의 여파가 끼치자 고물 값이 급락하고 식비가 치솟아 어려움을 겪는다. 세계 어디서든 가난한 사람이 그렇게 가장 먼저 세계화의 직격탄을 맞는다. 가난한 사람들과 누추한 풍경을 보이지 않는 쪽으로 밀어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재개발의 양상 역시 용산참사를 이미 목격한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저자의 눈에 비친 슬럼가의 사람들, 특히 아이들은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니었다. 자기 삶을 자기 방식으로 책임지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어른들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본 대로 증언하며, 피해자연하는 이웃의 아이와 가해자로 지목받은 집의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놀았다. 세심한 관찰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이들이 선택하는 삶의 전략, 발랄함을 생생하게 그려낸 것도 이 책의 미덕이다.


책에서 압둘은 “안나와디에서의 행운은 뭘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사고나 재앙을 얼마나 잘 피해 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기회의 불평등을 그렇게 체감한다. 압둘의 부모는 고철로 돈을 벌어 빈민촌을 벗어나기를 꿈꾸었으나 사소한 사건이 눈덩이처럼 커져 결국 좌절하고 만다. 가난을 벗어나려는 모든 시도를 가로막는 고질적 장벽은 욕지기가 치밀 정도로 지독한 부정부패다. 더 이상 교육과 경제성장을 통해 가난 탈출의 사다리를 오르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안나와디의 사람들은 셀 수도 없이 많은 것을 시도하지만 세상은 그들이 바라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급기야 무력한 개인들은 자신들의 결핍을 남 탓으로 돌리고 책의 중심 소재가 된 사건처럼 서로를 무너뜨리려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길가에 넝마주이가 죽어가도, 화상 입은 여자가 몸부림쳐도 외면하고, 앞길이 창창한 십대 소녀가 쥐약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어깨만 으쓱하고 만다. 왜 사람들은 서로 연대하지 않으며 공통된 고통에 둔감한가. 저자가 깊은 충격을 받은 대목도 그 지점이었고, 왜 그런지를 묻고 또 묻다가 저자는 스스로에게 답하듯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부의 정책 순위와 시장의 막강한 권위가 세상을 너무 변덕스럽게 만든 나머지, 이웃을 도우면 가족의 생계를 부양할 능력이 위협받고 심지어 개인의 자유마저 위태로워지는 세상이 될 경우, 가난한 공동체의 상부상조 개념은 무너진다. 정부와 시장의 선택 앞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를 탓하고, 중산층도 가난한 사람을 신랄하게 비난한다. 멀리서 보면 잊기 쉬운 사실인데 알량한 이익과 한정된 터전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에서 부패의 지배를 받는 하류 도시의 지친 주민들이 선한 태도를 유지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놀라운 점은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선량하며,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게 무너져버린 7월의 어느 오후에 압둘이 부엌 시렁을 놓다가 직면한 것과 비슷한 사태를 일상적으로 접하는 많은 사람들. 집이 기울어져서 무너진다면, 그 집이 놓인 땅 자체가 비스듬하다면, 모든 걸 곧게 세우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비스듬한 땅이 그대로 굳어버린다면 굳은 살 같은 둔감함, 타인의 고통에 대한 불감증도 만성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안나와디는 점점 더 뻔뻔해져가는 우리 사회의 다른 얼굴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책을 신흥대국 인도의 그늘을 다룬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사람들의 모습과 목소리를 드러내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읽기를 권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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