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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남자어둠 속의 남자 - 8점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열린책들


그래, 인생은 실망스러워
.

하지만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
이 괴상한 세상이 굴러가는 동안.

폴 오스터의 소설 ‘어둠 속의 남자’를 덮고 난 뒤 이 세 마디가 귓전에 오래 맴돌았다.
이 말들은 소설 속의 각각 다른 맥락에 등장하는 구절이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원래부터 하나였던 말처럼 들린다.

인생은 실망스럽고 여하튼 세상은 계속 괴상하게 굴러가겠지만 고통과 혼돈의 와중에도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 이 소설에서 폴 오스터가 들려주는 그 ‘방법’은 ‘이야기’이다.

72살의 은퇴한 도서비평가 브릴은 45세 된 딸, 23세 된 손녀와 함께 산다. 1년 전 아내가 죽은 뒤 브릴은 교통사고로 휠체어 신세가 되었다. 사위는 5년 전 딸을 버리고 떠났다. 손녀는 남자친구가 이라크 전쟁터에 가서 죽은 뒤 휴학하고 집에 와 있다.
슬픔과 상처받은 영혼으로 가득한 집에서 브릴은 매일 밤 침대에 누워 다른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우울을 물리치는 약’을 직접 조제하는 것이다.

브릴의 이야기 속에서 미국은 내전 중이다. 엉겁결에 전쟁터에 끌려간 마술사 브릭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자’를 죽이라는 임무를 맡게 된다.
자기가 만든 주인공에게 ‘나를 죽이라’는 희한한 미션을 부여하는 황당한 스토리를 뒤좇다 보면 결국 이야기는 브릴이 과거에 대한 자책, 은밀한 환상, 쓰라린 회한을 뒤섞어 쓴 그 자신의 서사임을 알게 된다.

소설에선 브릴의 이야기가 중심을 차지하지만 브릴의 딸, 손녀도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작가인 브릴의 딸 미리엄은 너대니얼 호손의 딸인 로즈 호손의 전기를 쓰는 중이다. 로즈 호손은 생애 전반을 우울하게 살다 중년에 수녀가 되고 존엄사를 옹호하는데 반생을 바친 실제 인물이다.
미리엄은 왜 인생을 바꾼 사람의 이야기에 몰두하는 걸까. 그녀 역시 인생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브릴의 손녀딸은 남자친구가 전장에서 살해당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매일 영화를 보면서 ‘감정이 있는 사물’들의 사례를 채집하는 데 골몰한다.

세 사람이 겪는 고통의 이유는 어찌 보면 비슷하다. 이미 잃어버렸으나 여전히 그 존재감이 생생한, ‘인생에서 중요했던 사람’들 때문이다.
브릴은 숨진 아내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미리엄은 남편이 떠나가면서 내뱉은 ‘끔찍한 사람’이라는 말 때문에 결혼생활의 파탄이 자기 탓이라고 괴로워한다. (내가 장담하건대 그 남편은 자기가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를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손녀는 남자친구가 느닷없이 전쟁터로 떠나 숨진 것이 관계의 결별을 선언한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한다.

자책하는 사람들은 선량하다. 적어도, 나쁘지는 않다.
작가는 “오로지 선량한 사람만이 자신의 선량함을 의심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선량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선량한 사람은 남들을 용서하면서 살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용서하지 못한다.”
이 책은 그렇게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겪는 고통, 그러면서도 서로가 이 ‘괴상한 세상’에서 행복하기를 바라가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는 이야기의 힘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

소설에서 정말 ‘치유의 힘’이 있다고 느낀 이야기는 브릴과 손녀딸이 나눈 마지막의 긴 대화였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별 것도 아니라는 듯 오래오래 털어놓은 뒤 손녀딸은 마침내 잠이 들고 이들은 아침을 맞았다.
새 날엔 그 날을 견뎌내게 하는 이야기가 또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슬픈 일이 있다고 해서 세상이 붕괴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며 손녀딸은 비통의 늪 바깥으로 열린 문을 향해 걸어 나갈 것이다.

브릴은 혼란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말들을 우리가 갖고 있다면” 이 괴상한 세상에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들려준다.
그 ‘말’은 굳이 정교하게 구성된 ‘이야기’여야 할 필요도 없으리라. 친구에게 두서없이 털어놓는 감정의 토로, 괜찮다는 위로 한 마디, 일기장에 풀어내는 맺힌 마음 한 조각, 책에서 밑줄을 긋는 말 한 구절…, 사실은 그런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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