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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 대해 뭘 더 읽을 필요가 있을까. 프랑스 생장피드보르에서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800km에 이르는 순례길. 이미 그 길 여행기 3권을 읽었다.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부터 시작해 도보여행가 김남희 씨의 ‘혼자 떠나는 걷기여행-산티아고 편’, 미국 수녀님인 조이스 럽의 ‘느긋하게 걸어라’까지.

이젠 눈을 감으면 순례자 숙박소 앞의 풍경, 길가의 우물까지 떠오를 정도다. 그런데도 자석처럼 이끌려 목록에 한 권을 더 추가하게 됐다.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 책을 읽고 난 뒤, 사는 일처럼 길 역시 누가 걷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수십 번씩 변주될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독일의 코미디언 하페 케르켈링이 쓴 이 책의 소문은 국내에 번역되기 전부터 들었다. 독일에서 오래 공부한 내 친구는 지난해 가을 카미노 산티아고에 갈 거라고 떠벌리던 내 말을 듣더니 이 책 이야기를 꺼냈다. 저자는 아주 유명한 코미디언이고 독일에선 이 책이 1년 넘게 베스트셀러 1위였다고 한다. 성공의 법칙(? 그런 게 있다면)을 알려주는 자기계발서도 아닌 이런 책이 그렇게 오래 1위일 수 있다니, 그게 더 인상적이었다.


이 길에 나선 사람들은 대개 뭔가 해결할 문제를 짊어지고 발을 내딛는다. 저자는 중년에 이르러 담낭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난 뒤 사고의 전환을 위해 카미노 산티아고에 오른다. 신이 과연 존재하는가도 그에겐 풀어야할 숙제 중의 하나였다.

엄숙한 질문을 안고 길 위에 오르지만, 이 책의 저자는 내가 읽은 산티아고 여행기 중 가장 경쾌하고 불량한 순례자다.

순례자는 숙박소에서 묵으며 경험도 나누고 해야 한다는 조언에도 “경험을 나누는 건 좋은데요, 무좀을 옮기고 뭐 그러는 것에는 영 관심이 없어서요”하고 호텔로 달려간다. “가난한 사람 흉내 내지 않겠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게다가 화장실과 샤워실을 30명과 같이 써야 하고, 낯선 이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한 방에서 7~8명씩 자야하고 사적 공간이 전혀 없는, “그런 게 끈끈한 인간적 만남이라면 하지 않겠다”고 우긴다.

억지로 꾸민 순례자의 경건함이 없어 좋다. 사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은 죄다 진솔하고 길 위의 풍경은 죄다 환상적이며 길 위의 모든 일은 죄다 깨달음을 준다는 식의 여행기들은 얼마나 지루한가.

순례자연 하지 않는 저자의 솔직함은 읽는 이가 ‘어, 이래도 되나?’싶을 정도까지 나아간다. 저자는 힘들면 히치하이킹을 하고 몸이 영 못 버틴다 싶을 땐 기차를 타버렸다. 순례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마지막 100km는 걸어갔지만, 남을 흉내 내지 않고 자기를 학대하지 않으며 내게 맞는 속도와 방식으로 가겠다는 고집이 마음에 들었다. 내 길을 찾기 위해 자기 자신이 싫어질 지경까지 스스로를 몰아세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농땡이 순례자였지만, 그에게도 길이 가르쳐주는 것은 있었다. 

저자는 순례길이 인생의 여정과도 같다고 돌아본다. 시작은 난산이었지만 중간쯤에는 긍정적 경험과 함께 오류와 혼돈이 공존한다. 때론 길 밖에 나앉기도 했다. 목적지까지 기쁜 마음으로 행진할 수 있게 된 건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다. 다른 순례자들과 어울리기를 피하던 저자가 다른 사람을 돌아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기본적으로는 스스로를 신뢰하되 작은 검토를 게을리 않는, “불신과 신뢰 사이의 균형을 잡는 법”, 삶의 사소한 불행들과 불투명한 미래를 개의치 않는 “유쾌한 담담함”을 스스로에게 가르치는 저자의 자세도 좋았다.


다른 여행기들과 이 책이 또 하나 다른 점은 길 위의 사람들 이야기다. 저자가 독일어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네덜란드어를 구사하는 덕택에 온갖 이유로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면모가 풍성하게 드러난다.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갑자기 공부가 부질없이 느껴져 간호사 교육을 받고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는 네덜란드 여인, 말기 유방암에 걸린 딸과 함께 이 길을 걷다 딸이 죽은 뒤 순례를 완수하기 위해 혼자 다시 걷는 엄마. 반면 몇 년간 이 길을 오르내리며 동냥만 하는 사람도 있다. ‘순례자’라고 명함을 파고 중세 수도사복을 입고 걸으며 여자를 꼬시는 데 혈안이 된 사람들도 있다. 이 길을 걸으러 오는 목적이 오로지 ‘섹스’인 사람도 있단다. ^^;

순례자 중엔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고 특히 남미 여성이 많다. 저자에 따르면 이 길은 남미 여성에게 커다란 결혼시장이다. “엄격한 가톨릭인 부모들이 자녀에게 미래의 배우자와 함께 돌아오라는 과제를 주어 보낸다”는 것이다. 남자 보쌈 하러 2천리 길 걷는 셈인데... 딸 참 터프하게들 키우신다…. -.-;


코미디언답게 웃음의 차이를 설명한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누군가 가슴으로 웃는다면 그건 “나는 위험한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뜻이다. …인종차별적 개그를 듣고 웃는 사람은 목에서 웃는다. 목이 열리지 않고 닫힌 상태인 것이다. …지식인의 경우 형식적으로는 빈틈이 없지만 내용적으로 별것 아닌 외설적 농담을 좋아한다."(!)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 - 나의 야고보 길 여행  하페 케르켈링 지음, 박민숙 옮김
독일에서 출간된 하페 케르켈링의 야고보 길 순례여행 에세이.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 험난한 순례코스로 유명한 프랑스의 생장피드포르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이르는 야고보 길에 도전한 총 42일간의 순례 여정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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