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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을 읽다. 소설집의 제목이 여기 실린 단편의 제목 그대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어도 좋을 것 같다.


퇴고과정에서 필수적이지 않은 모든 형용사와 부사를 솎아낸 듯 문장이 단단하고 건조하다. 최소한의 단어들만을 골라 사람들이 처한 어떤 상황을 보여준 뒤 카버는 뚝, 멈춰버린다. 주인공의 운명을 통제하는 전능한 지은이가 아니라, 그 후로 어찌 됐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어, 라고 말한 뒤 입 다물어 버리는 과묵한 남자처럼.
카버의 주인공들은 '생각'하는 대신 '행동'한다. 카버의 무심하고 간결한 말투를 따라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정말 별 것 아닌 사소한 몸짓 때문에.


표제작인 ‘대성당’을 먼저 읽으며 움찔하다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읽으면서는 끝내 울고 말았다. …얼마 전 내가 마신 숭늉 한 컵이 생각났다.

가족을 갑작스레 잃었을 때, 한동안 이를 악물고 버티다 엉뚱하게도 오랜 친구의 집에 가서 '행패'를 부린 적이 있다. 대상을 종잡을 수 없는 분노를 몇 시간 동안이나 게워낸 뒤 무너지듯 쓰러져 버렸다. 일어난 뒤 제 풀에 지쳐 방구석에 축 늘어져 있던 내게 친구가 가만히 다가왔다. 그가 건넨 건 ‘기운 내라’는 위로도, ‘정신 차리라’는 충고도 아닌, 숭늉 한 컵이었다.

구수한 냄새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컵에 코를 박은 채, 그 온기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비천한 마음이 되어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 참혹한 일로 가시 돋혔던 마음이 처음으로 순해질 수 있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은 그런 숭늉 한 컵 같은 이야기다. 줄거리는 아예 언급하지 않겠다. 직접 읽어보시라.


소설가 김연수 씨의 번역도 좋지만 원문도 읽고 싶어 아마존에 책을 주문했다. 김연수 씨의 ‘옮긴이의 말’을 보니 카버는 ‘대성당’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가장 아꼈다면서 두 이야기가 살아남는다면 정말 행복할 것이라 했다고 한다. 두 단편 때문에 한밤중에 눈물 흘려본 사람이 나만은 아닐 터이니, 그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제발 조용히 좀 해요>,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 이은 '레이먼드 카버 소설 전집'의 세 번째 권. 단편작가로서의 그의 재능이 절정기에 올라 있던 1983년에 출간되었으며, 총 열두 편의 단편이 수록되었다. 건조하고 차가운 카버의 시선이 훑고 간 일상의 풍경은, 읽는 이의 가슴을 저릿하게 압박해온다. 소설가 김연수가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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