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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자료사진
“그녀는 요리를 일종의 사랑의 행위로 바꾸었어요. 육체적 욕구와 정신적 희열 사이의 경계를 느낄 수 없는 고귀한 사랑 말이죠. 우리가 지금 먹는 요리는 그에 뒤지지 않아요.”

- 영화  <바베트의 만찬>에서 로렌조 장군이 파리 고급 레스토랑의 여자 요리사에 대해 이야기하며 -

덴마크의 우중충한 어촌을 오랜만에 다시 찾은 로렌조 장군은 초라한 집의 식탁에 둘러앉은 마을 사람들을 두고 일찍이 “죽에 소금도 안 치는 종교적 우울증 환자들”이라고 촌평한 적이 있다. 이들은 장군이 말한 바로 그 여자 요리사, 바베트로부터 프랑스식 만찬을 대접받는 중이다. 바베트는 “음식에 대한 생각을 거부해야 맑은 정신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금욕주의자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까.

오래된 영화 ‘바베트의 만찬’(DVD·에이나인)을 떠올린 것은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11분’을 읽고 나서다. 각각 음식과 성을 소재로 삼았지만 이 영화와 책이 주는 느낌은 비슷했다.

‘바베트의 만찬’에서 어촌 사람들은 ‘새로운 예루살렘’을 기다리며 세속의 쾌락을 거부한다. 이들의 식전 기도는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시어 영혼을 위해 일하도록 해주시옵소서”다. 음식은 그런 목적에 복무하는 것이지, 그들에게 음식 자체가 기쁨이거나 목적이었던 적은 없다. 금욕을 통해 영혼의 완성에 도달하는 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이다.

‘11분’에서 음반기획자 테렌스는 창녀 마리아에게 고통과 죄의식, 수치심의 극한 체험을 통해 황홀경에 도달하는 사도마조히즘의 섹스를 가르친다. 추구의 대상을 성적 쾌락이 아니라 영혼의 완성으로 바꿔놓고 본다면 죄의식의 끝없는 환기, 금욕(하는 고통)을 통해 이상을 좇는 어촌 사람들과 다를 게 없지 않을까.

그러나 바베트가 거북과 메추라기를 잡고 포도주를 공수해 와 준비한 프랑스식 만찬, 그 맛의 쾌락은 마을 사람들을 구원했다. 겉으론 평온해 보여도 서로 의심하며 죄책감에 짓눌려 살던 마을 사람들은 만찬을 ‘마녀들의 연회’처럼 두려워했지만, 결국 바베트가 최선을 다한 요리를 통해 즐거움을 긍정하고 근심을 깨뜨리는 포옹을 나누며 밖에 나가 달빛 아래 춤을 춘다.

‘11분’에서 마리아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보여준 화가 랄프도 “아픔은 쉽사리 중독되는 강력한 마약이니 습관들이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아픔, 희생을 추구하며 그 덕분에 스스로 존중 받을 만하다고 느끼는데, 왜 아픔과 고통이 사랑의 증거가 되어야 하느냐”고 묻는다. ‘바베트의 만찬’과 ‘11분’은 죄의식과 고통 대신 삶의 기쁨을 찬양하라, 몸의 쾌락에 솔직하라, 이를 통해 영혼의 구원에 이르게 될 거라고 속삭인다.

하지만 어촌 사람들은 두 번 다시 그런 요리를 먹을 수가 없을 테고 마리아는 랄프와의 관계가 반복적이 될수록 절정의 느낌을 잃어갈 것이다. 바베트는 만찬을 치른 뒤 다시 빈털터리가 됐고 마리아와 랄프의 ‘해피 엔딩 그 후’는 알 수 없다. 기쁨의 원천은 스쳐 지나가고 머물지 않는 것들이다. 절정의 순간을 영속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부질없다. 코엘료는 랄프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봄이 좀 더 일찍 찾아온다면 더 오래 봄을 즐길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할 순 없어요. 단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오. 어서 와서 날 희망으로 축복해 주기를, 그리고 머물 수 있는 만큼만 머물러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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