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반 전 겨울 무렵 처음 알게 되어,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번역한 책이 나왔습니다! "엘 시스테마, 꿈을 연주하다" 입니다.
제 블로그에 자주 오신 분들은 엘 시스테마의 이야기(요기, 그리고 요기), 그리고 제가 이 책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요기)를 아마 알고 계시겠지요. 책 번역해 펴내는 일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전 감개무량합니다. 이 책은 제가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그리고 딱 한 번 우연히 만났을 뿐인 낯선 이들의 친절이 아니었으면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꽤나 감동적인 방식으로 이 책을 제게 전해준 호세에게 드디어 책이 나왔다고 어제 메일을 보냈더니, 호세 할아버지는 느린 우편을 도저히 기다릴 수 없다면서 48시간 이내에 배달해주는 DHL로 받아볼 수 없겠냐고 흥분하시더군요.^^ 세상의 많은 책들이 그러하듯, 혼자서는 불가능했고 숱한 사람의 꿈과 수고를 모아 만든 이 책을 이제 세상 속으로 내보냅니다.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아래 옮긴이 후기를 붙였습니다. 쓸데없이 후기가 긴 탓에 접었으니 펼쳐 보세요 ^^
------------------------------------------------------- 옮기고 나서
클래식 음악이 어떻게 폭력에 노출된 가난한 아이들을 구원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처음부터 개인 교습이 아닌 그룹 단위로 클래식 음악을 가르치는 게 가능한 일일까?
음악으로 가난한 아이들의 삶을 바꾼 엘 시스테마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진한 감동에 뒤이어 떠오른 의문이었다. 나 자신이 문외한인지라 클래식 음악은 일부에 국한된 취미라는 편견이 있었던 데다, 잠깐 피아노를 배웠던 경험으로 미루어 개인 교습이 아닌 방식으로 어떻게 악기 연주를 배울 수 있는지 감이 오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소한 호기심이 결국 이 책을 찾아내어 우리말로 옮기는 인연으로까지 이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책은 엘 시스테마의 열렬한 후원자인 베네수엘라의 카리베 은행이 엘 시스테마 창립 30주년을 기념하여 발간한 것이다. 우리말로 옮기면서 나는 ‘연주하고 투쟁한다(Play and fight)’는 모토만큼이나 그들의 30년 역사가 연주와 동시에 음악 교육의 낡은 고정관념에 도전하고 빈곤과의 싸움에서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내는 분투의 역사임을 절감했다. 지금까지 국내에선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가 음악이라곤 접해본 적이 없는 거리의 아이들을 모아 엘 시스테마를 창립했다고 알려졌지만 책을 읽고 보니 그렇지 않았다. 처음의 기획은 클래식 음악을 공부해도 써먹을 데가 없던 젊은이들과 함께 엘리트 음악교육을 뒤집겠다는 혁명적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그 기획이 자연스럽게 빈민층 아이들을 구원하는 거대한 사회적 프로젝트로 이어진 것은 클래식 음악이 부유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것이라는 신념이 기획의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원서가 5년 전 발간된 ‘30주년 기념 헌정’ 책이라서 엘 시스테마에 직접 묻고 자료를 뒤적여 내 나름대로 이해한 엘 시스테마의 교육 방식, 현황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옮긴이의 말이 쓸데없이 길어질 텐데, 미리 양해를 구한다.
엘 시스테마는 이제 베네수엘라를 뛰어넘은 국제적 프로젝트로 성장했다. 현재 세계 25개국 이상에서 엘 시스테마를 모델로 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으며 2009년 미국의 저명한 음악학교인 뉴잉글랜드 컨서버토리, 비영리재단인 TED등은 힘을 모아 엘 시스테마 교육방법의 세계적 확산을 목적으로 한 ‘엘 시스테마 USA’를 설립했다. 뉴잉글랜드 컨서버토리는 엘 시스테마의 오케스트라 운영, 교육방법을 가르치는 1년 코스의 대학원 과정 ‘아브레우 펠로십’을 개설해 운영한다.
엘 시스테마는 창립 이후 베네수엘라 역대 정권이 일곱 번 바뀌던 와중에도 꾸준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우고 차베스 현 대통령의 집권 초기에는 정부 지원이 끊길 뻔했다고 한다.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차베스 대통령의 눈에는 엘 시스테마가 유럽 문화의 유산인 클래식 음악을 주로 가르치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엘 시스테마에 대한 지원이 중단되지 않았던 것은 빈곤과 싸우는 모델로서 이 조직이 쌓아온 성과 때문이었다. 1998년 유엔개발계획(UNDP)은 엘 시스테마가 빈곤 감소를 위한 사회적 운동에서 괄목할만한 모범 사례라고 추천하기도 했다.
엘 시스테마는 빈곤을 야기한 경제, 사회적 구조까지 건드리진 않지만 가난하기 때문에 생겨나고 가난을 대물림하도록 만드는 빈곤의 문화에 맞서 싸워왔다. 아브레우 박사는 2009년 2월 지식공유를 목적으로 한 비영리재단 TED가 수여하는 ‘TED 프라이즈’를 탄 뒤 인터뷰에서 테레사 수녀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들려주었다.
“가난과 관련하여 가장 참담하고 비극적인 일은 일용할 양식이나 거처할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느낌, 아무 것도 안 될 거라는 느낌, 존재감의 부재, 공적인 존중의 부재야말로 가장 비참한 일입니다.”
엘 시스테마가 빈곤의 문화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말이다. 엘 시스테마를 거쳐 간 아이들이 모두 음악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 조직 안에서 스스로가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서서히 자각하고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다. 아브레우 박사는 “가난한 집의 한 아이가 음악을 배우는 그 순간부터 아이를 둘러싼 가족과 이웃이 달라진다”고 했다. 아이가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 자신을 위해 더 나아지기를 추구하고 부모에게도 희망의 싹을 틔우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아브레우 박사는 “음악은 폭력과 마약, 성매매, 나쁜 습관 등 아이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모든 것을 가로막는 제1의 예방책”이라고 했다.
빈곤을 낳는 구조 자체를 바꾸지 않고 빈곤의 문화와 싸운다고 해서 어떤 효과가 있을지 회의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와 관련해서는 빈민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클레멘트 코스의 창시자인 얼 쇼리스가 <희망의 인문학>에서 했던 말을 들려주고 싶다. 클레멘트 코스를 창시하기 전 그가 빈곤에 대한 책을 쓰려고 뉴욕의 한 교도소에서 8년째 복역 중인 여죄수와 마주 앉아 “사람들이 왜 가난한 것 같나요?”라고 질문했을 때, 이런 답을 들었다고 한다.
“그 문제는 아이들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해요.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해요.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렇게 하면 아이들은 더는 가난하지 않게 된다니까요. 길거리에 방치된 아이들에게 도덕적 대안이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엘 시스테마의 철학을 떠올리게도 하는 대목이다. 이 여죄수가 말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이 뜻하는 것은 성찰적 사고의 능력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성찰적 사고능력과 의지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맞서 싸우는 데에서 필요한 정신적 힘이라는 뜻이다. 이후 클레멘트 코스를 운영하면서 쇼리스는 그가 만나 본 “빈곤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력의 포위망에 창조적, 적극적 대응을 했는데 이는 계급투쟁이라는 개념보다 운명에 대항하는 자유의 성장과 더 많은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고 썼다. 엘 시스테마가 베네수엘라의 가난한 아이들의 손에 악기와 함께 쥐어준 것도 이런 자유의 의지, 문화적 감수성, 성찰적 사고의 능력이 아니었을까.
음악을 통해 아이들의 정신적 힘을 성장시키는 데 있어서 개인이 아닌 그룹 단위로 교육하는 방식은 매우 중요했다. 엘 시스테마에서 그룹 교육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프로젝트의 본질이라 할만하다. 엘 시스테마는 교실에서 교수와 학생의 일대일 관계로 이뤄져오던 기존의 음악 교육을 연주자들의 커뮤니티, 지휘자, 관객과 수시로 접하는 역동적 관계에서의 집단 교육으로 바꿔놓았다.
2007년 저널리스트 마리아 엘레나 라모스(Maria Elena Ramos)와 가진 심층 인터뷰에서 아브레우 박사는 “클래식 음악 교육이 원래부터 솔로 퍼포먼스를 위주로 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7세기 유럽에선 ‘솔로 리사이틀’이라는 개념은 희박했고 음악가는 집단 안에서 어떤 기능을 하느냐가 더 중요했다고 한다. 음악 교육은 집단적 방식으로 이뤄지고 연주자들은 집단 속에서 연주하면서 배운다. 그런 본질을 되살리자는 것이 아브레우 박사의 목표였다.
예컨대 엘 시스테마의 오케스트라는 2년간 60회 가량의 공연을 치른다. 한 소년이 2년간 개인 레슨을 받았을 때와 60회의 콘서트를 통해 배우는 것의 차이를 떠올려보라. 혼자서 클라리넷을 연습하면 맞는지 틀리는지 알기 어렵지만 오케스트라에서 조율을 배우고 귀를 훈련시키면 숙련의 시간이 단축된다는 것이다. 아브레우 박사는 자신이 어릴 때 실력이 월등한 소녀와 함께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3년 걸릴 과정을 1년 미만으로 단축시켰던 경험을 소개하면서, 하루에 몇 시간씩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연주자 옆에서 연주해야 하는 상황은 아이들에게 파트너를 따라잡고 싶은 의욕을 부추긴다고 설명했다. 가능한 한 자주 관객 앞에서 연주할 기회를 갖는 것의 이점은 연주가 자연스럽게 삶의 일부로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또한 처음부터 그룹으로 음악을 배우기 시작하면 ‘옳은 소리’가 나지 않을 때 겪기 마련인 두려움 대신 음악은 함께 노는 즐거운 활동이라는 경험을 가질 수 있다. “열정이 먼저, 숙련은 그 다음”이 이들의 원칙이다. 노력을 통해 성취하도록 아이들을 자극하지만 그 어떤 노력도 재미가 없으면 지속적으로 기울이기 어렵다는 것을 이들은 잘 알고 있다.
취학 전 아동이 엘 시스테마의 교육 센터에 오면 처음부터 악기를 만지는 대신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동작을 먼저 배운다. 몸에 밴 리듬 감각이 악기 연주에서도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춤을 추듯 또래와 어울려 놀다가 다섯 살이 되면 리코더나 타악기 중에서 첫 번째 악기를 선택하고 합창단에도 참여할 수 있다. 일곱 살이 되면 현악기나 관악기를 선택한다. 매 주 ‘전체 앙상블’ ‘섹션 수업’ ‘개인 수업’ 등 세 차원의 학습이 번갈아 열리는데 그룹, 개인 레슨을 대부분 같은 교사가 지도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나쁜 습관을 빨리 발견해 교정할 수 있다.
엘 시스테마의 각급 교육기관이 학생을 선발할 때 기존 음악학교와 다른 점은 하루에 몰아서 보는 시험을 치르지 않는 것이다. 낯을 가리는 소심함 등 심리적 이유로 인해 잠재된 리듬 감각이 낯선 환경에서 쉽사리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음악적 환경에 노출시키고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면서 관찰하는 방식을 택한다고 한다. 교육 과정에서 가장 먼저 가르치는 클래식 음악은 모차르트와 차이코프스키다.
지휘자는 아버지, 연주자들은 형제자매, 스태프들은 어머니처럼 서로 밀접하게 교류하는 환경에서 아이들은 자신이 속한 원 가족과는 다른 가족, 폭력적이지 않고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새로운 가족을 체험한다. 이는 엘 시스테마의 그룹 교육이 빈곤 문화의 극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리를 집으로 삼고 살아가는 불량 청소년들도 자기들 나름대로 안전망을 만들기 위해 갱단에 가입한다. 엘 시스테마와 거리의 갱단 사이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소속감 부여를 통해 가난한 아이들이 스스로는 갖지 못했던 자긍심의 수준을 높여주고 인정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공동체라는 점이다. 거리의 ‘가족’인 갱단과 정반대의 극점에서 엘 시스테마는 문화적 자본인 음악을 매개로 새로운 ‘가족’을 제공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 집단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협동과 헌신을 가르친다.
엘 시스테마의 아이들 사이에선 아브레우 박사에 대한 숭배가 상당하다. “눈을 감고 자다가도 오케스트라 단원 중 한 명만 음이 틀려도 반드시 알아채는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다”던가 그의 남다른 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아이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며 단원들을 돌보는 그의 헌신적 능력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는다. 반면 연주 레퍼토리를 아브레우 박사가 모두 결정한다든가 지나친 우상화 경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곧잘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강력한 리더십이 오늘날의 엘 시스테마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책 한 권이 만들어지기까지 숱한 사람의 노고가 보태지는 것이야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특별히 감사를 표해야 할 사람은 베네수엘라의 호세 베르어(Jose Bergher)와 볼리비아 보토메(Bolivia Bottome)다. 이들과의 인연은 2008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 나는 엘 시스테마 이야기를 더 알고 싶어서 인터넷을 뒤지던 중 엘 시스테마를 후원하는 미국 단체의 사이트를 발견했다. ‘아님 말고’라는 심정으로 연락처에 나와 있는 사람 중 아무나에게 메일을 보내 엘 시스테마를 소개하는 영어로 된 책이 있느냐고 물었다.
다음날 호세라는 사람에게서 답장이 왔다. 베네수엘라에서 출판된 책 영어 번역본이 절판됐는데 자기가 스캐닝을 받아놓았다면서 원하면 보내주겠다고 했다. 보내주면 좋겠다고 답장을 보낼 때만 해도 압축 파일로 만들어 보내줄 줄 알았다.
웬걸, 그 다음날부터 호세의 메일 융단폭격이 시작됐다. 메일 한 개에 책 한 페이지를 스캐닝한 파일을 하나씩 첨부해 잇따라 보내는 거였다. 그렇게 182페이지짜리 대형 판형의 책 한 권을 받는데 3일이 걸렸다. 나 같으면 귀찮아서 그냥 없다고 했을 텐데, 낯선 사람에게 엘 시스테마를 알리기 위해 3일간 182번이나 ‘보내기’ 버튼을 누르는 ‘노동’을 하다니. 디지털 문서를 다루는 솜씨가 서툴러 그렇기도 했겠지만 그의 정성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답례로 선물을 보내고 싶은데 주소를 알려달라니까 호세는 감사 메일로 충분하니 선물은 됐다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은퇴한 첼리스트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첼리스트로 활동하다 1980년 조국 베네수엘라로 돌아가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 신포니카 베네수엘라’에서 20년간 일했던 음악가다. 메일에서 그는 조국 베네수엘라, 친구인 아브레우 박사, '엘 시스테마', 무엇보다 여길 거쳐 간 아이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어디 내세우고 인정받으려는 종류의 자부심이라기보다 순수한 기쁨으로 반짝이고, 한 사람에게라도 더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고, “너도 할 수 있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한 자부심이었다. 책 한 권을 다 보낸 뒤에도 호세가 계속 베네수엘라에서 엘 시스테마를 다룬 글들을 영어로 번역해 보내주는 바람에 내 메일함은 엘 시스테마의 온라인 데이터베이스가 되어버렸다. 앞서 끼적인 설명도 호세의 메일 공세 덕분에 알게 된 것들이다.
볼리비아는 엘 시스테마의 국제관계 담당 디렉터인데 2008년 12월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 때 느닷없는 나의 인터뷰 요청에 응한 ‘죄’로 거의 1년 반 가량을 내게 시달린 사람이다. 호세와 거의 동시에 내게 영문판 책을 보내주었고 한국어판 출간 제안을 아브레우 박사와 논의하고 카리베 은행의 담당자를 찾아 소개해주는 온갖 실무적 일들을 귀찮아하지 않고 성실히 주선해주었다. 딱 한 번 만났을 뿐인데 나 몰라라 해도 상관없을 사소한 질문에 일일이 답해주던 볼리비아의 친절 역시 한 사람에게라도 더 엘 시스테마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열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선의와 온기가 이 책에 실려 독자에게도 전달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동안 내가 가장 자주 들었던 음악은 구스타보 두다멜의 지휘로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멕시코 작곡가 아르뚜로 마르케스(Arturo Márquez)의 <단쏜 2번(Dazón no.2)>이었다.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언젠가 DVD에서 보았던, 카라카스의 허름한 뒷골목을 걸어가는 어린 소녀의 뒷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해가 쨍쨍한 어느 날, 아이 혼자 걷기엔 위태로워 보이는 거친 분위기의 골목에서 검은 머리를 찰랑거리며 걷던 소녀……. 음악을 들으며 그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단쏜의 처연한 곡조가 보이지 않는 보호막처럼 그 아이를 부드럽게 휘감아 지켜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떠올렸다. 지금 이 땅의 구석진 곳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도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를 감히 바란다. 네게 음악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