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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6코스 제지기 오름에서 바라본 한라산. 하루 전만 해도 날이 흐려 눈 덮인 위쪽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 날은 운이 좋았다.

제주도에 꽤 자주 가는 편인데 한동안 사진으로도, 글로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제주 올레도 전체를 다 걸어보고 싶단 생각은 있지만 완주의 기록을 굳이 '달성'해보려는 목적 없이 여러 코스를 반복해 걷기도 하고 일부 구간만 걷기도 하다 보니, 어디를 몇 번 갔는지 가보지 않은 곳은 어디인지 그런 것들이 가물가물 잘 생각나지 않는다. 2년 전만 해도 코스를 좔좔 외우고 다녔는데......

 

그러고 보니 원고청탁을 받거나 일 때문에 꼭 써야 하는 경우가 아니면 글을 쓰지 않은 지도 꽤 오래 되었다. 페이스북에 가끔 끼적이긴 하지만 글이라 하기도 뭐한 장난기 어린 낙서들. 그곳의 낙서나 블로그의 낙서가 뭐가 다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약속한 기한을 훌쩍 넘긴 책 계약 건도 떠올릴 때마다 빚진 사람 심정이고, 글을 계속 안 쓰면 급기야는 못 쓰게 될 거란 조바심 때문에 뭐가 됐든 목적 없는 글이라도 써보려 한 적이 종종 있었지만, 늘 몇 시간을 넘기질 못했다. 그럴 때마다 점점 자주 느끼는 위기감, 이렇게 세계가 나에게 비좁아져 갈 것이란 위기감으로 맘이 서늘해진다.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 없이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 익숙한 대상에만 함몰되는 일상. 별 생각 없이 나이 들어가는 것이 딱 이런 것이겠다 싶다.

 

 

5코스로 넘어가 거꾸로 걷다가 앉아 쉰 큰엉의 해변. 어제 오후 이 바다를 보면서 곧 서울에 돌아가야 한다는 게 어찌나 싫던지......

 

나는 중요한 국면에 종종 문을 열고 나가는 방식을 선택해왔지만, 세계의 축소에 저항하는 방식이 꼭 박차고 나가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연초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조르주 모란디 전을 다녀왔는데 도록에 적혔는지 다큐멘터리에서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마음에 남은 모란디의 말이 있다..

"중요한 것은 보이는 것을 성실하게 보는 것."

평생 방 안에서 정물을 그렸다던 은둔의 화가가 같은 물병과 잔을 이리저리 다르게 배열하고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며 그 때에 가장 마땅한 사물의 존재감을 찾아내어 그린 그림들. 언뜻 보면 다 비슷비슷한 그림들의 미세한 차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모란디의 일상은 고독했겠지만 작은 사물을 통해 그가 구축한, 결코 작지 않은 세계는 윤기 나는 고독으로 충만했을 거란 느낌이다.

 

원고료를 받는 글만 보관용으로 올려놓던 블로그에 오래간만에 쓰는 글이 매우 불성실한 포스팅이지만, 하여튼. 중요한 건 성실하게 보는 것이다. 그러고 싶다, 올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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