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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그만둔 뒤 만나는 사람들이 "그래서 이제 뭐할 거야?" 라고 물을 때마다 나도 모르겠다고 답하는 나날들. 가고 싶은 모호한 방향은 있고 그리로 가기 위해 뭘 할지 뜬구름 잡는 공상은 중구난방 피어나지만, 구체적인 '무엇'은 나도 모르겠다. 해볼 수 있겠다 싶은 걸 조금씩 실험해보는 수밖에 없는데, 그것도 히말라야 트레킹 다녀온 뒤에 생각하자고 유보해둔 상태다.

대신 '무엇' 말고 '어떻게'는 자주 생각한다. 불확실함에 대처하고 내 삶의 틀을 다시 세우는 과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나. 지금 당장 내게는 '무엇'보다 그 '어떻게'가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정한 첫 번째 '어떻게'는 매일의 의례를 만든 것이다. 인류학자들이 조사한 무수한 사회에서 사람이 성년이 되는 전환의 시기에 겪는 위험들을 다스리려 통과의례를 마련하듯, 불확실한 전환의 시기에 나를 지탱해주는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불안을 다루는 몸과 마음의 ‘근력’ 높이기를 목적으로,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되는 매일의 시시한 일 두 개를 정했다. 새해 들어 오늘 나흘째니 작심삼일은 면했고 ㅋ.

더불어 생각하는 또 하나의 '어떻게'는 미래를 선취(先取)하기, 원하는 삶의 모습을 떠올려보고 그것 중 가능한 것들은 현재로 들여와서 지금 살아보기다.

독일의 젊은 철학자 나탈리 크납은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에서 희망을 만들어내는 방법 중 하나로 '미래를 기준으로 현재를 생각하기'를 권고한다.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지를 상상하고, 그러고 나서 그렇게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곧장 실천해보자는 제안이다. 미래를 기분 좋게 현재로 들여와서 삶의 각 영역을 하나하나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탈바꿈시켜가자는 것. 사회적 문제와 관련해서는 공동의 책임이 있으므로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 저마다 자신의 전망을 만드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먼저 시작할 수 있는 것들을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능력으로 미래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희망은 벌써 오래전 부터 여기에 존재하는 미래에 사로잡히는 것, 그것을 통해 현재를 비로소 제대로 향유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최근에 읽은 엄기호의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철학자 이종영을 인용하면서 저자는 세상을 바꾸는 혁명을 이야기할 때 혁명을 두 단계로 나눠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건으로서의 혁명. 그리고 두 번째는 혁명의 판타지가 붕괴하고 난 뒤 '혁명의 실제 속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혁명', 즉 과정으로서의 혁명이다. 앞의 혁명을 혁명 1, 뒤의 혁명을 혁명 2라고 부른다면 시간 순서로 1은 2에 앞선다. 그러나 1이 혁명이기 위해서도, 그리고 뒤이어 혁명 2가 나타나기 위해서도 "혁명 2가 혁명 1에 앞설 수도 있다"는 것이다.

1에 앞서는 2의 예로 이종영은 이스라엘의 키부츠, 미국의 아미시 공동체, 노동자 평의회 등을 거론한다. 혁명 1에 선행하는 혁명 2의 과정 속에서 보편적 개인들이 탄생한다. 이 보편적 개인들은 물론 '섬'과 같은 존재이지만 이 섬들에 기반을 두고 혁명 2가 지속되고 혁명 1의 계기가 만들어진다. 혁명 1이 일어난 뒤 잇따라 혁명 2를 맞이하고 일으키려면 그 전에 미리 부분적으로라도 혁명 2를 살아갈 주체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톨릭 운동에서는 교회가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부분적으로 선취'한 공간이자 관계라고 바라본다고 한다. 이런 설명에 이어지는 엄기호의 말.

"미리 경험해본 자만이 '이후'를 준비할 수도 있고, 맞이할 수도 있고, 살아갈 수도 있다. 살아보지 않은 자는 살아갈 수 없다. 살아봄의 경험이 선순환을 만들 수도 있고, 살아보지 못함의 경험이 완전히 폐쇄적인 악순환의 고리로 빠지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전환'의 가능성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이후'를 미리 살아볼 수 있는가 하는 데에 달려 있다."

미래를 현재로 들여오기. '이후'를 미리 살아보기. 두 책 모두 사회적 차원에서 고려해볼 과제를 말한 것이지만, 당장 불확실한 전환기를 통과하는 나는 개인의 삶 차원에서도 그런 '미래의 선취'가 있어야 정말로 삶의 틀을 바꿀 수 있겠구나 싶었다. 어려운 것도 아니다. 10년쯤 뒤에도 계속 트레킹을 할 수 있는 몸을 갖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근력운동을 시작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환경을 바꿔보고 싶거나 어떤 상황에 대한 내 반응을 바꿔보고 싶다면 스스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줄이고 실제 환경과 행동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낫다. 그게 내가 지금 떠올릴 수 있는 미래 선취의 방법이다.

그래서 한 일이..좀 생뚱맞을 진 몰라도, 차를 팔았다.

내가 살고 싶은 방식과 어울리는 물건과 그렇지 않은 것들, 가끔씩 편리하긴 해도 꼭 갖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 등을 생각해보니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자동차였다. 스물여섯에 운전면허를 딴 뒤로 차가 없어본 적이 없는데 나는 막히지 않는 도로를 고속주행하는 것은 즐기지만 시내의 정체와 자동차 소음은 끔찍하게 싫어한다. 속도의 유혹이 올라오면 차를 빌리면 된다. 아무 미련도 없이, 내 차에 대한 마지막 예우(?!)로 내가 무척 좋아하는 사람들을 태우고 속초 여행을 다녀온 뒤 차를 팔았다. 흥미로운 건 차를 팔았다고 했을 때 가까운 몇몇 사람들이 보인 반응. "아이고, 저런...." 하고 딱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정말 괜찮냐고 묻는 친구들도 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일상에서 차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에 잠깐 놀랐고, 농담으로 “차 팔아 그 돈으로 히말라야 갈란다” 하고 떠들고 다닌다.

내가 원하는 방식이 있다면 지금부터 그렇게 살아보려는 노력, 소소하지만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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