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에 번역한 책 《푸른 눈 갈색 눈》에 쓴 옮긴이 후기와 해설을 옮겨 놓는다. 지금은 그때와 생각이 달라진 대목 (예를 들면 한겨레신문 칼럼으로 쓴 아래 글 '역지사지는 가능한가'가 그때와 달라진 요즘의 생각) 도 있지만 어쨌든. 계속 관심이 가는 주제라서 다른 맥락에 옮겨놓고 보기 위해 블로그 게재.
지금 당신의 손에 이 책이 들려 있게 된 사연은 열한 살 소녀가 서툰 솜씨로 그린 한 장의 그림에서 시작되었다. 도화지의 위쪽 절반에는 주먹만 한 글씨로 ‘다른 나라 사람을 차별하지 마세요’라고 쓰여 있다. 그 아래엔 덩치 큰 아이 세 명이 나란히 서서 혼자 동떨어진 작은 아이를 향해 소리친다. “저리 가! 너는 우리랑 달라!”
작은 아이는 이 세 명에게 맞서는 모양새로 이렇게 항변한다. “아니야! 나는 너희와 같아.”
작은 아이의 모델이자 그림을 그린 소녀는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를 둔 다문화가정의 아이다. 내가 이 그림을 본 것은 2010년 가을, 우연한 계기로 비영리 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에서 일하기 시작한 직후였다. 단체 연구진이 유엔아동권리위원회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려고 자료 수집을 이미 마친 프로젝트에 뒤늦게 합류한 뒤 그림을 그린 아이의 동영상 인터뷰도 보게 되었는데, 또랑또랑한 눈빛의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우리랑 다르다고 막 얘기하고… 어렸을 때요. 제가 발음이 많이 이상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애들이 (나더러) ‘너 우리랑 같은 사람 아니지? 저리 가’라고 하고, 만날 놀리고 그랬는데… (학교에서) 다문화가정인 사람 손들라고 만날 그러잖아요. 그럼 저밖에 손드는 애가 없잖아요. 그러면 애들이 ‘쟤 다문화가정인가 봐’ 어쩌고저쩌고해요.”
이 아이는 “똑같은 사람이고 말만 다를 뿐인데, 다문화가정이라는 말은 필요도 없고(듣기) 싫다”고 했다. 다문화가족지원법이라는 법률도 있고 지방자치단체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있기에 다문화가 가치중립적 개념으로 쓰이고 있으려니 했던 나로서는 다소 의외였다.
그러고서 며칠 뒤에는 단체 활동가들에게 인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의 동아리 활동을 지원했던 경험을 듣게 되었다. 동아리 아이들이 직접 같은 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다문화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평소 다문화가정의 아동 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두 개만 적어보라’는 주관식 질문이 있었다.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은 이랬다. “따돌림, 더럽다, 외모, 의사소통, 아프리카, 초콜릿, 짜장면, 흑인, 불행…….”
이 학교 학생 중엔 외모로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다문화가정 아이는 없다고 했다. 설문에 응답한 학생들이 다문화가정 아이를 직접 본 적이 있건 없건 간에 ‘다문화’라는 개념 자체에 따라붙는 편견의 리스트가 놀라웠다.
내가 차별과 편견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두 사례를 접하고 난 뒤부터다. 말투나 피부색처럼 단순한 특징으로 ‘너는 다르다’라고 판단하고 이에 근거해 쉽게 차별하며 완강한 편견을 갖는 마음의 구조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사방에서 다문화 사회를 말하지만, 한국 사회는 정말 다양해지고 있는 걸까?
의문을 안고 자료를 뒤지던 중, 이 책의 주인공인 제인 엘리어트의 실험을 접하게 되었다. 엘리어트의 실험에서 핵심 주제인 ‘차별당하는 사람의 마음 공감하기’를 응용한 프로젝트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한겨레신문〉의 오피니언 사이트 ‘훅(hook)’에 그 내용을 글로 썼다. 그 뒤 초등학교에 찾아가 엘리어트의 실험을 응용한 연극 수업을 진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공연할 연극 작품을 만들 무렵, 한겨레출판의 눈 밝은 편집자께서 이 책을 찾아내 번역과 해설을 제안해왔다.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는 것은 ‘다문화’라고 놀림받는 게 얼마나 가슴에 맺혔던지 그림을 그리고도 모자라 도화지 오른쪽 위 귀퉁이에 별표를 치고 ‘중요’라고 적어놓았던 소녀가 맺어준 인연이다. 우리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의 끈을 통해 다가온 당신에게,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제인 엘리어트의 실험이 21세기 한국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차별은 오로지 나쁜 환경의 영향에서 비롯된 비뚤어진 마음일 뿐인가? 나는, 그리고 당신은 차별 따위 하지 않는 사람인데 왜 차별에 대해 생각해야 할까?
1. 《푸른 눈 갈색 눈》 이후의 제인 엘리어트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제인 엘리어트가 스무 명 남짓한 아이를 대상으로 ‘차별의 날’ 수업을 준비하고 실행하면서 고심을 거듭하고 번민했던 흔적이었다. 스스로 여태까지 해본 일 중 가장 불쾌한 경험이었다고 말하면서도, 한 번의 실험이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의 태도를 바꿀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면서도, 가족이 폭력을 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텅 빈 교실에서 혼자 울지언정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평생을 살아야 하는 삶을 아이들이 단 하루라도 살아보게 하고, 그렇게 해서라도 한 집단을 향한 다른 집단의 무분별한 차별과 증오의 두터운 관념에 균열을 내고 싶었던 그녀의 의지가 놀라웠다.
아쉽게도 이 책은 엘리어트가 1986년 교사를 그만두고 다양한 기관에서 차별 수업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데에서 끝난다. 이후 엘리어트가 살아온 궤적이 궁금해 번역을 마친 뒤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엘리어트는 오늘날 보편화한 다양성 교육(Diversity Training)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라이스빌의 학교를 떠난 뒤 그녀는 주로 기업, 정부 기관, 대학에서 성인을 상대로 다양성 교육을 해왔다. 1990년대 들어 국제 이주의 증가로 민족적 배경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회사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짐에 따라 다양성 교육에 대한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엘리어트는 유명한 TV 쇼인 〈오프라 윈프리 쇼〉에 여러 차례 출연해 더욱 유명해졌고, 미국 전역뿐 아니라 호주, 캐나다, 독일, 네덜란드,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등 세계를 누비며 교육을 진행했다. 은퇴를 일찍 한 것 같지도 않다. 엘리어트가 1933년생이니 2012년 현재 79세인데, 불과 3년 전에도 그녀가 다양성 교육을 진행한 사례를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가 했던 것처럼 그녀의 실험을 영상에 담으려는 시도도 잇따라서 2001년 호주, 2009년 영국에서 TV 다큐멘터리가 제작됐다.
엘리어트가 차별 실험을 시작한 1968년과 세상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녀는 여전히 차별의 기본 구조는 같다고 보았다. 2002년 미국 공영방송 PBS와 한 인터뷰에서 엘리어트는 “세계 어디에서나 실험 결과가 똑같았고, 특히 올해 스코틀랜드에서 한 실험 결과가 1968년 라이스빌에서 아이들과 했던 실험 결과와 다르지 않아서 좌절했다”라고 개탄했다. 그녀는 미국에서처럼 유럽의 백인도 유색인을 차별하면서 자신들이 인종차별주의자임을 부정한다고 지적했다. 21세기 들어 많은 이들이 이제 인종차별주의가 사라졌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실제로 차별을 겪어보지 않은 백인이라는 것이다.
인종차별에 관한 한, 비타협적 투사인 엘리어트는 여전히 비장했다. 그녀는 실험을 할 때마다 편두통을 앓았고, 21세기에도 이런 교육이 필요한 상황을 혐오한다고 했다. 1968년 이후 평생 백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며 살아왔으니 그녀가 얼마나 백인의 미움을 샀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라이스빌에서 그녀가 가르친 학생들 사이에서 엘리어트는 영웅이지만 주민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라이스빌 전체를 인종차별주의자의 마을인 것처럼 만들어놨다는 이유로 주민들은 오늘날까지 그녀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다고 한다. 엘리어트는 살해 위협도 여러 차례 당했다. 1970년대 중반 시카고에서는 그녀의 실험에 격분한 백인들에게 살해 협박을 당하는 바람에 한밤중에 흑인들의 도움을 받아 마을을 탈출했다. 다양성 교육을 진행하는 도중 백인 남자에게 칼로 위협당하는 일도 있었다.
엘리어트의 실험과 관련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백인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되레 주된 논란은 실험의 방식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참가자들에게 미리 알리지 않고 그들을 불편한 상황에 몰아넣는 설정이 비윤리적이라는 지적도 있었고, 고압적인 태도로 개개인을 지목해가며 가혹하게 대하는 진행 방식도 비판받았다.
나도 이번에 책을 번역하면서, 아이들에 대한 엘리어트의 의도적 차별이 그저 한 그룹을 조금 편애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이들이 받을 상처가 걱정될 정도로 집요하다는 데에 깜짝 놀랐다. 엘리어트는 아이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제공하는 사소한 단서들을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었다. 남보다 책을 늦게 펴면 바로 “갈색 눈의 사람을 기다리다 시간을 얼마나 많이 낭비하는지 아느냐”라며 공격했고, 푸른 눈의 아이가 안경을 가져오지 않으면 “갈색 눈의 아이는 절대 안경 가져오는 걸 잊어버리지 않는다”라고 비교했다. 심지어 브라이언 샐타우를 때린 아버지의 눈동자 색까지 들먹이며 차별의 상황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까지 해도 되나 걱정될 정도였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신뢰가 두텁지 않으면 실험 이후 심리적 회복 과정이 쉽지 않겠다는 우려도 들었다.
시대적 변화를 무시한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예를 들면, 2009년 영국 TV 방송 채널 4가 촬영한 엘리어트의 실험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 실험에는 다양한 민족, 인종적 배경의 성인들이 참여했는데, ‘열등한 그룹’은 반발했고 ‘우월한 그룹’은 차별하는 일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은 모두 백인인 반면 갈색 눈을 가진 사람 중엔 백인이 없었기 때문에, 눈동자의 색이 더 이상 인종을 암시하는 은유나 상징이 아니라 인종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되어버렸다. 영국의 언론은 인종 대립이 미국처럼 심하지 않은 영국에서 1960년대 미국의 방식을 적용하는 것이 무리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엘리어트가 시동을 건 다양성 교육이 과연 효과적인지도 논쟁거리다. 장기적 효과를 측정하기가 어려운 데다,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사람들을 가깝게 하기보다 멀어지게 한다는 지적도 많다. 노련한 강사가 이끌지 않을 경우 소수자를 과민하게 만들기도 하며, 다수자에게 죄책감을 갖도록 함으로써 되레 이들이 실제로 소수자를 적대시하는 역효과도 생겨난다. 엘리어트 자신도 숙련되지 않은 교사가 이 실험을 진행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해왔다.
엘리어트의 실험이 차별을 줄이는 데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평가하는 학술적 연구도 하나의 결론으로 모아지지 않는다. 스트레스를 가중시킬 뿐이라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이 책에서 소개한 것처럼 실험을 한 지 3년 뒤 측정한 결과 이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또래에 비해 훨씬 인종차별적 태도가 덜하다는 긍정적 반응도 있다.
이처럼 논란과 한계가 많음에도, 나는 엘리어트의 실험이 그저 30여 년 전 미국에서 있었던 특이한 시도라고 치부하기엔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즉 이 실험은 사람들이 어떤 때에 ‘우리’와 ‘그들’을 나누어 ‘그들’을 차별하기 시작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었고, 구체적 방식이야 다를지언정 그렇게 차별하는 마음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길 하나를 열어주었다.
2. ‘그들’과 ‘우리’ 사이, 경계 만들기와 지우기
엘리어트의 실험에서 내 눈에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호칭을 둘러싼 다툼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차별 실험 수업을 하던 첫날, 아이들 사이에서 주먹다짐이 벌어졌다. 그날 우월한 그룹인 푸른 눈을 가진 아이가 열등하다고 낙인찍힌 갈색 눈의 친구를 이름 대신 “야, 갈색 눈!”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성인 대상 실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오와 주 교정국 직원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차별당하는 처지에 놓였던 푸른 눈의 여성은 엘리어트가 “거기 세 사람”이라고 부르자 “나한테도 이름이 있다. 내 이름을 불러달라”고 거세게 반발했다.
사람들을 ‘푸른 눈’과 ‘갈색 눈’으로 나누지 않았다면, 누가 ‘우리’고 누가 ‘그들’인지 분리하지 않았다면,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던 아이들이 친구를 “야, 갈색 눈!”이라고 부르는 일도, 그렇게 불렀다고 친구를 때리는 일도, “나에게도 이름이 있다”라고 반발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우리’와 ‘그들’이 나뉘면 사람들은 신속하게 ‘그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우리’ 집단의 구성원에 대해서는 개별성과 개인이 처한 상황의 맥락을 고려하지만 ‘그들’ 집단에 대해선 개별성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그들’일 뿐이다. 개개인이 모두 다르고 각양각색인데도 피부색이나 종교, 출신 국가, 경제적 지위처럼 그들은 모두 똑같다는 걸 암시하는 쉬운 표지를 발견하면 개개인의 차이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니 눈동자 색에 따라 일부러 그룹을 나누든, “다문화가정은 손들어”라는 지시에 따른 것이든, 나와 다르다는 구분을 발견한 순간 어제까지 친구였던 내 짝의 이름이 사라지고 ‘갈색 눈’ 또는 ‘다문화’가 된다. 2010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이주 아동의 교육권 실태조사’에서도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차별받은 경우를 묻자, 피부색과 발음 때문에 놀림받은 경험과 함께 이름 대신 출신 국가에 따라 “야, 몽골”, “야, 베트콩”으로 불렸다고 털어놓았다.
이렇게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그들’을 차별하는 행위는 눈동자 색, 출신 국가, 피부색처럼 금방 눈에 띄는 차이에 따른 것만도 아니다. 구분 자체가 사소하고 황당해도 일단 한 집단으로 묶이면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을 선호하고 다른 집단을 차별하는 속성을 나타낸다. 영국의 사회심리학자 헨리 타즈펠(Henri Tajfel)의 집단 구분에 관한 유명한 실험이 이를 보여준다. 연구진은 피실험자인 학생들에게 파울 클레(Paul Klee)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그림을 보여준 뒤 마음에 든다고 응답한 그림에 따라 이들을 ‘클레 그룹’과 ‘칸딘스키 그룹’으로 나누었다. 그런 다음 학생들에게 실험 참가비를 나눠주는 일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클레나 칸딘스키가 누군지 모르는 학생도 많은 데다, 모든 구성원에게 해당되고 오래 지속될 만한 특징도 없는 무의미한 집단이다. 게다가 학생들은 같은 그룹의 누구와도 말을 할 수 없었고 서로 얼굴도 몰랐다. 그런데도 실험 결과 학생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구성원에게 유리하게 비용을 책정했다. 같은 그림을 선택했다는 사소한 이유가 학생들로 하여금 우리 편과 그들 편을 가르는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눈동자 색 혹은 그림이 아니라 동전을 던져 나오는 앞뒷면에 따라 그룹을 나눠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의미 없는 구분이더라도 분류하는 행위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편을 가르고 자기편을 선호하며 상대편에게 불이익을 주도록 만드는 계기가 된다.
특별히 편 가르기 성향이 발달한 사람들만 이런 집단의 구분을 일삼는 것은 아닌 듯하다. 사람이 선량하고 나쁘고의 문제도 아니다. 외면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은 이렇게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속성이 군집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비롯된 본능적 정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그리고 인류학적 조사에서도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지 않은 사람들은 없었다. 사람들은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기 위해 언제나 가장 쉽게 인식할 수 있는 차이에 의존해왔다. 피부색처럼 생각할 필요 없는 간단한 표지가 생각하고 배워야 하는 개념보다 훨씬 빠르게 작동한다. 여기에 각 집단이 오랫동안 처해 있던 사회적․경제적 지위가 덧붙여져 고정관념이 형성된다.
이런 고정관념은 아이들 사이에서도 만연해 있다. 일례로, 세이브더칠드런은 2011년 봄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차별 방지를 위한 연극 수업을 시작할 때 약식 조사를 해보았다. 4학년 아이들에게 “영화배우 캐스팅 제안이 들어왔으니 함께 배역을 골라보자”라고 제안하면서 백인, 아시아인, 흑인의 사진을 각각 보여주었다. 필요한 배역은 사장과 걸인, 악마와 천사였다. 캐스팅 결과 아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악마에 흑인 남성, 사장에 백인 남성, 천사에 백인 여성, 걸인에 아시아 여성을 골랐다. 아시아 여성에 대해선 “가난하게 생겨서”가 이유였고, 흑인 남성은 “무섭게 생겨서”, “손에 총을 들고 있어서(총이 아니라 카메라였다)” 악마로 골랐다.
피부색에 근거한 편견은 더 이른 나이인 네다섯 살 또래에서도 나타난다. 2010년 미국 TV 방송 CNN은 시카고 대학의 아동심리학자 마거릿 빌 스펜서(Margaret Beale Spencer) 교수에게 의뢰해 인종에 대한 아이들의 태도를 조사했다. 1947년의 유명한 인형 실험을 재연해서 인종에 대한 아이들의 태도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려는 의도였다. 1940년대에 인형 실험을 했던 학자는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 부부다. 클라크 부부는 흑인 아이들에게 백인 인형과 (그 당시엔 흑인 인형이 없었으므로) 백인 인형을 갈색으로 칠한 인형을 보여주고 뭘 좋아하는지 선호도를 조사했다. 그 결과 흑인 아이들 사이에서도 흑인 인형 혐오와 백인 인형 선호가 압도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인종 분리 교육을 하는 학교에 다니는 흑인 학생일수록 인종적 편견과 자기혐오가 내면화되었음이 밝혀졌고, 이 실험은 1954년 공립학교에서 인종 분리 교육이 위헌이라고 결정한 브라운 판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CNN의 조사는 그로부터 60년 넘게 세월이 흐르고 미국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에 진행되었다. 인종에 대한 아이들의 고정관념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실험은 8개 학교에서 4~5세와 9~10세의 두 그룹을 대상으로 진행했고, 백인에서 흑인까지 피부색만 다를 뿐 얼굴 생김새와 옷차림이 똑같은 다섯 명의 아이 그림을 보여주며 누가 착해 보이고 누가 나빠 보이는지를 묻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 백인 아이들은 두드러지게 백인 선호도를 보였고, 흑인 아이들도 정도는 덜했지만 백인을 선호하는 태도를 나타냈다. 아이들은 흑인이 나쁘다고 응답했는데, 그 이유를 묻자 “피부가 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백인 아이들은 하얀 피부색을 긍정적 특징과, 검은 피부색을 부정적 특징과 연결시켰다. 흑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네다섯 살만 그런 게 아니라 열 살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결과는 같았다.
인종차별을 극복하려는 제도적 노력을 오랜 세월에 걸쳐 해왔고 흑인 대통령이 나온 뒤인데도 여전히 대다수 아이가 인종적 편견을 갖고 있다는 실험 결과는 꽤나 놀라운 것이어서 인터넷에서 한동안 화젯거리였다. 그러나 이 실험의 핵심은 모든 아이가 고정관념을 갖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백인 아이들이 흑인 아이들보다 훨씬 강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스펜서 교수는 가장 큰 이유가 부모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일 거라고 추정했다. 백인 부모는 자녀에게 피부색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태도의 위험성을 가르치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피부색이 문제가 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흑인 부모는 피부색 때문에 사회의 차별과 편견으로 자녀가 상처받을 가능성을 의식하기에 아이들과 인종 문제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2007년 학술 저널 〈결혼과 가족(Journal of Marriage and Family)〉에 실린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를 둔 백인 부모의 75퍼센트는 인종을 주제로 자녀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답한 반면, 같은 연령대의 자녀를 둔 흑인 부모는 75퍼센트가 인종 문제에 대해 자녀와 이야기해본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백인 부모에게 인종차별은 지나간 과거이자 그들과 상관없는 이야기다. 제도적으로는 인종 간 평등이 정착되었으므로 아이들에게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차별할 일이 없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실과 다르다. CNN의 조사 결과가 보여주듯 차별과 편견의 위험, 그리고 공감의 필요성을 의식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피부색의 차이로 사람을 판단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고정관념을 갖기 십상이다. 이 책에서 엘리어트가 흑인이 한 명도 없는 마을의 백인 아이들에게 굳이 차별 실험을 했던 이유도, 피부색에 근거한 차별이 터무니없다는 사실을 일부러 깨우치지 않는다면 아이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편견이 싹터 마치 그들 자신의 믿음인 것처럼 자리 잡게 되리라 우려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아이들은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데 부정적 환경에 처했기 때문에 의식이 왜곡되고 차별적 태도를 갖게 된다”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안타깝게도 과학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들려준다. 백지 상태인 아이는 없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공동의 목적이라는 감각을 갖게 되며 ‘우리’에 귀속되려는 성향을 자연스럽게 발달시킨다. 한 사회가 갖는 관용과 배려의 수위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지겠지만, 구분과 경계, 고정관념의 형성과 차별은 일정 정도로는 어쩔 수 없이 발생한다. 부족적 본능에 근거해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성향, 먼 옛날에는 효율적이었을지 몰라도 현대를 살아가는 데에는 맞지 않는 마음의 태도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되레 인간이 본성상 차별을 하지 않는 존재라고 바라보는 낙관주의가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문제는 세대가 거듭될 때마다 반복해서 교육하고 일부러 깨우쳐야 하는, 끝나지 않는 숙제와 같다.
하지만 나쁜 소식만 있는 건 아니다. 집단 간의 편견과 적대 못지않게 서로 협력하는 모습도 숱하게 관찰되어온 인간의 본능적 속성 가운데 하나다.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베레비(David Berreby)가 《우리와 그들, 무리 짓기에 대한 착각(Us and Them: Understanding Your Tribal Mind)》에서 소개한 ‘로버스 케이브(Robbers Cave)’ 캠프 실험은 그처럼 집단 구분에서 비롯되는 암울한 상황, 그리고 이를 뛰어넘는 해결의 실마리를 함께 보여준다.
1954년 심리학자 무자페르 셰리프(Muzafer Sherif)와 연구진은 오클라호마 주에 사는 백인 중산층 출신의 열 살 소년 스물두 명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각각 따로 캠프장에 보냈다. 이들은 널따란 캠프장에 자신들 말고 다른 그룹이 있다는 걸 모르는 상태였다. 각 그룹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각각 ‘방울뱀’과 ‘독수리’라는 이름과 심벌, 그룹 내의 행동 규칙을 만들면서 놀았다. 엿새째가 되던 날, 소년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캠프장에 다른 그룹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년들의 첫 반응은 ‘쫓아내자’와 ‘한판 붙자’였다고 한다. 마침내 서로 마주치게 된 두 그룹은 그날부터 열 살짜리 소년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욕설을 동원한 전쟁을 벌였다. 성장 환경이 비슷한 또래의 백인 소년들이 상대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채 캠프장에 도착한 지 2주 만에, 마주칠 때마다 서로 ‘거지’, ‘계집애’, ‘깜둥이’, ‘빨갱이’라고 부르며 싸우는 적대적인 두 집단으로 변해버렸다.
여기까지만 보면 상황은 절망스럽다. 간단한 표지로 집단을 가르고 배척과 반목을 일삼는 사람들의 행태 그대로다. 그러나 베레비는 셋째 주의 실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연구진은 이들이 집단 구분을 버리고 전체를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하는 일이 가능한지를 실험했다. 그리고 두 그룹의 소년들 모두가 맞닥뜨리고 함께 해결해야 하는 목표를 순차적으로 제시했다. 우선, 캠프의 유일한 물탱크 꼭지를 막아버렸다. 멀리 야영장에 데려가며 음식을 배달하는 트럭을 일부러 고장 내고, 소년들이 힘을 합해 음식을 스스로 준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일부러 뒤섞인 텐트를 나눠주었다. 공통의 과제를 어쩔 수 없이 함께 해결해가면서 소년들 사이에서는 ‘그들’을 비하하는 충동이 잦아드는 동시에 ‘우리’에 대한 열광도 시들해졌다. 일주일 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소년들은 그룹 구분을 무시하고 섞여 앉았다.
이 실험의 결론은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사람을 쫓아 한 패가 되는 게 아니라, 한 패가 되고 난 뒤 서로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패거리의 구분은 외부의 객관적 실체에 따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의적이다. 서로 경멸하다 일주일 만에 그룹 구분을 뛰어넘은 소년들처럼, ‘우리’와 ‘그들’의 경계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거나 무너질 수 있다. 실험 결과에 고개를 주억거리다가도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만약 현실에서도 갈등을 겪어본 그룹, 예컨대 백인과 흑인 소년 그룹을 대상으로 실험했어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까?
베레비에 따르면, 비슷한 의문을 품은 다른 심리학자가 9년 뒤 실험을 재연했다. 이번엔 종교 분쟁이 심한 레바논에서 기독교인 열 명과 모슬렘 여덟 명을 모았다. 연구진은 소년들을 섞어 ‘푸른 유령’과 ‘붉은 요정’ 팀으로 나누었다. 예상대로 두 그룹은 싸우기 시작했는데, 싸움이 너무 살벌해진 탓에 연구진은 도중에 실험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뜻밖의 사실은 싸움이 현실 세계에서 죽고 죽이던 기독교 대 이슬람이 아니라, 푸른 유령 대 붉은 요정 팀 사이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외부 세계와 격리된 캠프에 들어오자 소년들은 도저히 타협 불가능할 것 같던 기독교인 대 모슬렘이라는 구분을 쉽게 버리고 그 대신 캠프에서 형성해준 조건 대로 푸른 유령 대 붉은 요정의 구분을 선택했다.
다소 위험해 보이는 이 두 실험이 들려주는 교훈은 희망적이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분은 고정된 실재가 아니라 마음속에 존재하므로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자의적인 ‘무리 짓기’는 어처구니없는 편 가르기와 차별이라는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반대로 서로 다르다고 굳게 믿는 집단이 사실은 별로 다르지 않으며 경계를 허물 수 있다는 해결의 실마리를 보여주기도 한다. 만약 ‘로버스 케이브’ 캠프의 소년들처럼 ‘우리’의 폭을 넓힌다면 어떻게 될까? 같은 그룹 안의 사람끼리도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다른 그룹의 사람들도 얼마나 비슷한지를 알게 해 그룹 간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버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엘리어트는 이 경계를 뛰어넘는 방법으로 ‘우리’를 ‘그들’의 자리로 몰아넣는 실험의 형식을 선택했다. 그녀는 눈동자 색에 따라 ‘우리’와 ‘그들’을 나누어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들었지만, 아이들은 자신이 있던 안전한 자리를 떠나 ‘그들’의 처지에 서보는 경험을 했다. 이런 교육 방법이 옳은지를 둘러싼 논란과 별개로, 상대방의 처지를 체험하게 함으로써 임의적 차이로 집단을 구분하는 일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마음의 훈련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종 차별에 대응하는 다문화 교육이 발달한 미국에서는 이 밖에도 집단의 경계를 뛰어넘으려는 목적으로 고안된 교육 방식이 많다. 예를 들면, 인종적․민족적 배경이 다른 아이들이 뒤섞여서 협력하는 조건을 만드는 조각 그림 맞추기 수업(Jigsaw Classroom)이 있다. 이 수업의 진행 방식은 이렇다. 아이들을 여섯 명씩 여섯 개 그룹으로 나누고, 각 그룹은 수업 시간에 필요한 정보의 6분의 1만 배운다. 그런 다음 각 그룹의 구성원이 한 명씩 고루 섞이도록 다시 그룹을 짠다. 새로운 그룹에 들어온 아이들은 자기가 이전 그룹에서 배운 내용을 서로 설명해주면서 정보 전체의 퍼즐을 맞춰간다. 공통의 목표를 위해 다른 사람들과 협력해야 하는 방식의 이 수업은 인종 간의 관계를 개선하고 자긍심을 높이는 데 효과적인 결과를 보였다. 또 인종이라는 범주 자체를 버리도록 고안된 차별 방지 교육도 있다. 아이들이 상대방을 어떤 인종적 그룹의 구성원이라고 바라보는 대신 개인의 특질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내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다양성의 존중을 가르치는 여러 교육 방법 가운데 인종적 편견과 고정관념을 장기적으로 감소시켰다고 두루 인정받은 하나의 방법은 아쉽게도 아직까지 없다고 들었다. 최상의 교육 방법을 고안해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쉽게 경계를 짓고 고정관념을 만들어내는 우리 마음의 습관이 그만큼 강고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3. 상대방의 신을 신고 걸어보기
인종에 대한 편견은 한국 사회와 무관한 말일까? 통계로만 봐도 그렇지 않다. 2010년 국내에서 결혼한 부부 열 쌍 중 한 쌍이 다문화가정일 정도로 결혼 이민자와 이주자 수가 늘어나고 있지만, 한국 국민 사이에서는 여전히 자민족 중심적 태도와 의식, 이에 근거해 우리보다 못하다고 간주하는 외국인에 대한 우월감이 강하다. 2011년 7월 국가인권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피부색, 인종, 민족, 종교, 출신 국가 등 다문화적 요소를 이유로 차별당했다며 진정을 제기한 사례가 2005년부터 2010년까지 6년간 두 배로 급증했다. 또 2012년 4월 여성가족부가 성인 2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발표한 ‘다문화 수용성 조사’에서 ‘다양한 인종, 종교, 문화가 공존하는 것이 좋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의 36퍼센트였다. 이는 유럽 18개국의 평균 찬성 비율인 74퍼센트의 절반 이하다.
게다가 한국 사회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현상은 이주자 출신국의 경제력, 당사자의 피부색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경향이다. 같은 다문화가정이라도 일본에서 온 이주자보다 베트남, 캄보디아 등에서 온 이주 여성과 아동은 상대적으로 큰 차별 대우를 받는다. 솔직히 나는 다문화와 관련한 한국의 현주소는 인종차별주의, 그것도 백인은 선망하고 피부색이 어두운 동남아시아인이나 흑인은 차별하는 이중적 인종차별주의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이 글을 쓸 즈음,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된 필리핀 출신 결혼 이주 여성 이자스민 씨에 대한 공격을 우려하는 기사가 주요 매체를 도배했다. 이자스민 씨에 대한 공격은 사회의 상층부에 오르게 된 이주민이 겪을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인 걸까? 하지만 몇 년 전, 독일 출신 결혼 이주 남성인 이참 씨가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됐을 땐 누구도 공격하지 않았다. 주요 매체에 실린 이런 지적에 공감하며 한국인의 이중성에 혀를 차다가 한편으론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같은 매체들이 그 직전 수원에서 발생한 여성 토막 살해 사건을 보도할 때에는 외국인 혐오증을 부추기기라도 하듯 ‘조선족, 또 한국인 살해’와 같은 제목을 뽑았던 게 생각나서였다. 흉악범을 묘사하면서 범죄 자체와 무관한 민족적 특성을 끄집어내어 한국인에게 테러를 가한 이방인으로 규정하는 시각 역시 지독한 차별 아닌가?
나는 이주자의 부적응보다 한국인들이 이주자들에게 행하는 차별과 배제가 다문화 사회와 관련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사실 말이 좋아 ‘다문화 사회’지, 우리는 다문화 사회를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했다. 다문화에 대한 관심이 확산된 것은 2000년대 초반 결혼 이주 여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부터였다. 2006년 정부가 결혼 이주 여성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면서 ‘다문화’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다문화가 국제결혼 가족을 일컫는 말로 한정돼버린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다문화는 이주자의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정책과 제도에 이를 반영하는 본래적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이른바 ‘다문화 없는 다문화 사회’인 셈이다. 모든 정책은 결혼 이주자 여성과 그 자녀의 교육 등 궁극적으로 한국인으로 포함되는 대상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결혼 이민자의 ‘동화(同化)’에만 주력할 뿐, 그 외의 이주 노동자는 고려 대상에서 빠졌다. 결혼 이민자도 복지의 시혜 대상으로 간주함으로써 의도하지 않게 다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차별적 용어로 인식되는 낙인 효과도 생겨났다.
초국가적 이주는 계속 늘어나고 한국의 인구 구성은 더욱 다양해질 터이다. 현재 한국 사회가 대답해야 하는 질문은 다른 문화나 특정 집단을 받아들일 것이냐 마느냐를 논의하는 다문화 이전에,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하는 보편적 인권의 문제다. 외국인인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를 생각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생각할 때다. ‘그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과제인 것이다.
2011년 세이브더칠드런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비차별 연극 수업 프로젝트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흔히 ‘다문화 캠페인’ 혹은 ‘다문화 지원 사업’이라 하면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만 따로 모아놓고 한국 문화 체험 학습을 하거나 세상에는 다양한 문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해외 문화 체험류의 이벤트에서 끝난다. 나는 그보다 다수자인 한국 아이들이 가진 편견을 깨고 자신과 다른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교육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 제인 엘리어트의 실험을 참고했던 이유는 그 실험의 핵심인 공감 훈련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상대방의 자리에 갖다 놓아보는 마음의 훈련, 엘리어트의 말마따나 “상대방의 모카신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는” 노력을 통해 아이들에게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나쁜지를 쉽게 이해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리어트의 실험에서 차별당하는 사람의 심정을 직접 겪어보는 설정은 유지하되 심리적 스트레스를 최대한 줄이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궁리 끝에 선택한 방법이 연극 수업이었다. 아이들은 연극이라는 안전한 틀 안에서 상처받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할 수 있다. 동시에 연극이라 해도 아이들이 차별당하는 상황을 연기하면서 겪을 감정 자체는 실제적이므로 감정이입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기대를 품고 어린이 전문 극단 사다리에 의뢰해 2011년 서울․경기 지역의 5개 초등학교에서 12주간 차별 방지를 위한 연극 수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연극 수업에서 아이들이 보인 반응과 대사, 상황을 재료로 전문 작가의 창작을 거쳐 그해 겨울 〈엄마가 모르는 친구〉라는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여기에서는 인천의 한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과 함께 진행한 연극 수업 〈버스 사건, 차별은 노!노!노!〉를 잠깐 소개할까 한다. 극단 사다리의 연극놀이 강사와 배우가 주 1회씩 학교를 방문해 진행한 이 수업의 소재는 1955년 미국 몽고메리 주 앨라배마에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Rosa Parks)가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운전기사의 지시를 거부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이후 인종차별에 맞서는 대규모 저항운동이 불붙는 도화선이 되었다.
연극 수업에서 강사는 아이들에게 파크스의 이야기를 전부 들려주는 대신, ‘버스’, ‘싫어요’, ‘흑인’ 등 몇 개 단어를 던져주고 파크스에게 일어난 일을 추측해서 구성하도록 했다. 사건에 대한 설명 없이 핵심 단어만 제시했을 뿐인데도 아이들이 함께 줄거리를 추리할수록 실제 파크스의 이야기와 비슷한 장면이 만들어졌다. 아이들은 돌아가면서 파크스가 되어보기도 하고, 뒤에서 이를 지켜보는 흑인, 파크스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백인, 운전기사,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벌이는 흑인 인권 운동가,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가 되어보면서 직접 대사를 쓰고 역할을 연기했다.
그 뒤 아이들은 과거의 이야기에서 빠져나와 현재의 경험, 즉 현실에서 자신이 직접 차별을 겪어보았는지, 그 경험과 로자 파크스의 이야기 속 차별은 어떻게 다른지,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편견을 갖고 사람들을 대하지는 않는지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파크스에게 일어난 일이 2020년 우리에게도 일어난다면?’이라는 가정하에 자신들이 토론한 경험을 소재로 〈버스 사건, 차별은 노!노!노!〉라는 연극을 새로 만들었다. 연극 자체는 어설프게 만들어졌을지언정, 아이들은 역할 연기를 하면서 자신들이 일상에서 겪은 차별의 경험을 떠올리고 재해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차별받는 흑인의 역할을 연기했던 열한 살 소년의 소감은 다음과 같았다.
“(흑인이라서 놀림받는 역을 맡았을 때)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다 같은 사람인데 피부색이 다르다고 차별받는 일은 안 좋다고 생각해요. 3학년 때 공부 못하는 친구 한 명이 차별당하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차별하는 친구들한테)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때는 말하지 못했어요.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놀림당했던 친구에게) 친구들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려) 노력해보자고 말하고 싶어요. (놀리던 친구들에게는) 친구를 차별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제는 차별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았기 때문에 예전과 달리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의 차별에 대한 각성이 이처럼 다른 깨달음으로 파급되는 경험. 소년이 얻은 이런 소박한 자각이 내게는 이 교육으로 거둔 가장 큰 성과였다. 14년이 흐른 뒤에도 배운 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엘리어트의 학생들처럼 이 아이들에게도 오래 지속되는 변화가 일어난다면 좋겠지만, 과욕이라는 것을 안다. 한 번의 수업으로 차별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마음이 아이들 사이에 뿌리내렸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연극 연출자와 배우가 진행한 수업을 일선 교사가 실행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일선 교사들도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교재 제작을 검토하고 있다. 이 방법 말고도 아이들에게 차별당하는 마음을 공감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더 좋은 교육 방법이 많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차별적 의식과 태도를 버리고 다양성을 수용하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나를 다른 사람의 자리에 갖다 놓아보는 경험, 상대방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는 연습은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4. 나는 아니라고? 정말 그럴까
엘리어트의 실험이 비판받은 지점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을 차별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실제로 누구를 차별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갖도록 하는 게 옳으냐 하는 문제였다. 어느 경우든 차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회의 다수 구성원, 특히 웬만해서는 남을 대놓고 차별하지 않는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마음이 복잡해지는 일이다. 라이스빌 주민들이 엘리어트가 주민 전체를 인종차별주의자로 만들어놓았다고 분개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이해할 만하다.
1980년대에 재일 한국인들이 차별과 편견의 벽을 뚫고 다문화 공생의 공동체를 만들려고 분투하던 일본 가와사키 시에서도 그랬다. 재일 한국인의 지문 날인 거부 운동이 첨예한 사회적 이슈이던 그 시기에 사회복지법인 세이큐샤(靑丘社)가 재일 한국인 청소년들이 중심이 된 회관을 건립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고 나선 일본인 주민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린 차별한 적이 없다. 우리 마을엔 차별 문제가 없다. 자꾸 후레아이(ふれ-あい, 상호접촉)를 강조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차별해온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는 평화로운 마을을 파괴하고, 자는 아이를 깨우는 것과 같다.”
가와사키 시의 경험을 정리한 책 《다문화 교육과 공생의 실현》(김윤정 지음)에서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에 맞서 싸웠던 활동가 양태호 씨는 이렇게 말했다. “차별을 없애 나가고자 하는 과정에서는 왜 차별을 하면 안 되는가라는 보편적 원리가 도출된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그것이 양날의 칼이 되어 자신은 차별하고 있지는 않은지가 문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차별에 대해 묻는 것은 굉장한 긴장을 동반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인종차별에 관한 한 비타협적 투사였던 제인 엘리어트도 이 양날의 칼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집을 세놓게 되었을 때 엘리어트는 “세놓을 대상이 백인이냐 유색인종이냐”라는 전화 문의에 ‘이웃이 전부 백인’이라는 우회적인 말로 유색인을 배제했다. 그 뒤 입으로는 차별의 극복을 말하면서 막상 일이 닥치면 그것을 직면할 능력이 없는 자신을 오랫동안 증오하며 괴로워했다고 고백했다.
차별하지 말자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편견과 차별에서 벗어난 삶의 방식을 몸에 익히고 실천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그러므로 차별을 없애자는 말은 일방적 규탄이나 비판이 아니라 다수자에게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 불편한 질문을 《블랙 라이크 미》의 저자 존 하워드 그리핀처럼 철저하게 받아안은 사람도 아마 없을 터이다.
백인인 존 그리핀이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1959년에 피부를 염색하고 흑인으로 변신한 뒤 인종차별의 본산지인 남부를 여행하는 극단적 실험을 한 이유는 한 흑인에게 이런 말을 듣고 나서였다고 한다. “백인이 흑인의 현실에 관해 한 가지라도 이해하려면 어느 날 아침 흑인 피부색을 하고 깨어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피부색을 바꾸고 머리를 깎았다. 그러나 옷차림과 말투, 경력은 그대로 유지했다. 백인들은 자신이 흑인이라는 집단을 차별하는 게 아니라 한 개인의 자질을 보고 판단하는 거라고 주장하곤 했다. 그들 주장대로라면 피부색만 바꿨을 뿐 이름과 작가의 경력을 그대로 유지한 존 그리핀의 삶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과 몇 시간도 안 되어 자신의 예측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개인적 자질을 보고 그를 판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피부색으로 그를 판단했다. 백인 여자나 남자는 흑인인 존 그리핀을 보는 순간, 그가 흑인의 모든 부정적인 특징을 가졌을 거라고 바로 넘겨짚었다. 백인들은 ‘흑인 존 그리핀’을 한 개인으로 보지 못했다. 나는 이 철저한 시각의 전환이 존 그리핀의 실험에서 가장 놀라웠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흑인이 전체 ‘흑인 집단’에 속하는 존재라면, 백인은 항상 개인으로 존재한다. 늘 흑인을 공정하고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해온 백인은 흑인이 자기들을 믿지 못하거나 심지어 적대시한다는 걸 알면 불편해하고 화를 낸다. 이들은 자신이 흑인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대목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개인으로는 흑인을 점잖고 ‘착하게’ 대하던 백인이 집단으로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어 흑인의 인격적 자존감을 파괴하고, 존엄성을 훼손하며, 존재의 섬세한 결을 뭉그러뜨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고의적으로 누군가를 차별해본 적이 없는 선량한 사람들이 이주자를 대하는 태도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대체로 이주자를 점잖게 대하지만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그들을 집단에 속하는 존재 이상인 개인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노골적 차별 행위를 보면 분개하고 부끄러워하면서도, 이주자가 한국인 일반을 공격하면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나는 차별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일부러 죄책감을 자극하는 엘리어트의 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차별이 그저 못된 사람들의 무작스러운 행위가 아니라 자신에게도 질문을 던지는 ‘양날의 칼’임을 잊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고 본다. 내가 비난하는 편견과 고정관념이 내 마음 안에는 없는지, 쉽게 ‘우리’와 ‘그들’을 나누려는 마음의 속성이 내 안에는 없는지 들여다보려는 성찰적 노력이 필요하다.
한발 더 나아가서, 집단을 만들고 경계를 설정하고 쉬운 표지로 고정관념을 형성해서 그에 근거해 차별하는 이 고질적인 마음의 습관을 뛰어넘는 궁극적인 길은 개별성의 존중을 핵심에 둔 마음 근육의 단련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를 오직 ‘우리’의 구성원으로만 여기면 공감은 사라진다. 무차별적인 ‘우리’에 파묻히면 모두 균일한 존재로 돌아가고 만다. 개별성이 사라져 일련번호라도 붙일 수 있을 듯한 균일한 존재에 누가 공감할 수 있을까.
《공감의 시대(The Empathic Civilization)》를 쓴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람의 부서지기 쉬운 유한한 본성과, 그 사람의 약점과 하나뿐인 목숨을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공감은 우리가 “한 사람의 실존적 외로움과 개인적 곤경과 살아남아 성공하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마치 우리 자신의 것처럼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수동적 자세인 동정과 달리 공감은 ‘적극적인 참여’다. 상대방에게서 나 자신을 보고 내 안에서 상대방을 인식할 줄 아는 상상력이다. 상대방의 신을 신고 기꺼이 걸어보고자 하는 마음가짐이고, 다른 사람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자신의 것으로 경험하는 능력이다.
‘우리’와 ‘그들’의 구분이 생각의 수고를 덜기 위해 거의 본능적으로 작동되는 낡은 범주라 할지라도 나와 다른 사람이 나처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능력, 공감의 능력은 인간성의 필수불가결한 부분 중 하나가 아니던가. 적어도 교실 안, 아이들이 함께 배우는 공간 안에서는, 특히 각기 다른 아이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가르치는 교사의 머릿속에서는 ‘우리’와 ‘그들’에 대한 구분과 경계가 없어야 한다. 그래야 개별성을 고려하기 시작하고, 개인의 고유함을 알아보게 되고 “야, 갈색 눈!”, “야, 다문화!” 대신 아이들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게 될 것이다.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는 당신 역시 어떤 종류든 다수자의 범주에 하나라도 해당되는 게 있는가? 그렇다면 한 번쯤은 제인 엘리어트가 권한 대로 기꺼이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기를 청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