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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극단 생활

연기를 하다

sanna 2022. 10. 3. 20:33
태어나서 처음 연극무대에 서봤다. 9월 24일 '극단 85'가 춘천 연극제의 생활연극 경쟁부문인 소소연극제에 나갔다. 2월에 공연했던 “망각은 진화를 결정한다”를 20분으로 축약한 버전으로. 
어쩌다가 연기를 처음 해보는 내가 여자주연을 맡았고, 내 상대역으로 남자주연을 맡은 친구가 우수연기상을 탔다. 취미생활이지만 잘해보려고 모두가 시간과 에너지를 들였고 참가 자체만으로도 즐거웠는데, 상까지 타서 아주 신났던 춘천행이었다.
 
연극제를 앞두고서는 대사를 까먹는 악몽을 몇 번 꿀 정도로 무대가 두려웠는데, (물론 입장할 땐 떨렸지만) 되레 무대에 올라 조명을 받고 관객 앞에서 하는 연기가 연습 때보다 더 큰 몰입감을 갖게 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봤자 ‘발 연기’에 불과했지만.
 
이 경험을 즐기고 싶은 기분에 연극의 한 장면을 페이스북에 1주간 임시 프로필로 걸어뒀는데, 댓글을 보니 의외로 연극이 로망, 버킷리스트라는 시람들이 꽤 많아 놀랐다.
 
난 왜 시작했더라…그냥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싶었나.
6년 전 매주 촛불집회에 나가면서 몇십년만에 만난 대학 친구들이 탄핵 이후에도 헤어지기 싫었던지 합창반 연극반 같은 모임을 만들었다. 연극반인 ‘극단 85’의 첫 공연 때 난 정부에서 막 일하기 시작하던 때라 티켓박스 일만 도와주고 극단을 나왔다. 정부 일을 그만둔 뒤 복잡한 마음으로 끙끙 앓을 때 극단 친구가 “의무, 당위와 상관없고 재미 이외에 아무 목적이 없는 활동을 해보라”고 권유해 극단에 다시 들어갔고, 올해 2월 극단이 연우 소극장에서 이틀간 공연할 땐 음향 오퍼레이터를 맡았다.
 

연기 연습은 올해 4월부터. 처음부터 연기를 시작한 게 아니라 매표소에 앉아 있다가 음향 오퍼를 거쳐 배우가 됐으니 연기를 해보고 싶은 마음을 차근차근 쌓아왔다고 해야 하나.
 
처음 해보는 연기는 당연히 어려웠다. 대사를 그럭저럭 외워 읊긴 하겠는데 묘사하려는 상황에 내 어조가 맞는지, 시선은 어디다 둬야 할지, 몸에 거추장스럽게 달린 것만 같은 손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다. 주워들은 풍월로 캐릭터 분석도 해보고 먼저 시작한 친구들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따라했다. 내 목소리가 그토록 작고 흐리다는 사실도, 내가 복식호흡을 거의 못한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연극에서는 작은 호흡부터 큰 동작까지 온 몸이 재료였다.
 
우리가 공연한 '망각은 진화를 결정한다'는 극작가 고재귀의 작품으로 2165년 우주 선착장이 무대다. 망각이 진화에 유리하다고 주장하며 버튼 하나로 과거의 힘든 기억을 지우는 신기술에 환호하는 남자와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기억을 간직해야 한다고 믿는 여자가 만나 벌어지는 일로 마지막엔 세월호의 기억과 연결된다.
 
연출은 연기를 어떻게 하라고 직접 알려주진 않고 내가 보기에 내가 표현해야 하는 감정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이미지들, 내가 감동한 연설 동영상을 찾아서 가져와보라고 했고, 그걸 자주 보라고 주문했다. 흉내내라는 게 아니라 그 연설에 감동한 나의 감정을 느껴보라는 것이다. 과거에 내가 극 중 캐릭터와 유사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면 그 감정의 기억을 떠올려보기를 제안했다. 내 동작을 관찰하면서 어떤 건 채택하고 어떤 건 수정했으며 캐릭터를 조금씩 바꿔갔다. 우리 연극 주제에 잘 맞는 음악이라며 피터팬 컴플렉스의 '다 모두 그냥'을 들어보라고 링크를 보내주었다. 
 
그런 연출을 지켜보는 게 감탄스럽고 재미있었는데, 원레 이렇게 하는 건지 내가 너무 못해서 나한테 맞춰주느라고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후자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연습을 일곱번인가 했던 날, 좀 걱정이 돼서 연출에게 "아무리 아마추어라지만 내 연기가 무대에 올릴만한 수준은 되느냐"고 물어보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연기는 신인 배우인 거야 어쩔 수 없는 건데, 선배님(연출은 우리를 이렇게 부른다)이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통제하려는 거 바깥으로 감정이 삐져 나올 때, 그 감정이 진짜일 때 보는 사람에게도 마음이 전달된다. 그거면 된다"라고 했다.
 
그러네. 내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데 남이 나를 믿어줄 리가 있나. 곧잘 연출한테 내가 맡은 캐릭터는 이러저러한 성격의 사람인데, 그 사람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가 따위의 질문을 하던 나를 보면서 그가 좀 갑갑했겠구나 싶었다.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연극을 시작했는데, 이건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이라기보다 겪어보지 않은 특정한 상황에 놓인 내가 이전에 겪었던 감정의 기억에 기대어 그 상황이 유발하는 감정을 느껴보고 그걸 스스로 믿는 데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같았다. 나는 인지적 공감은 잘하려고 애쓰지만 정서적 공감에 무딘 사람이라 이 과정이 어려웠지만,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내 연기가 그럴 듯했느냐와 상관없이 그렇게 애써본 것 자체의 보람이 있었다.
 
지금 극단이 연습 중인 또 다른 작품은 콜센터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콜센터의 노동조건과 사람들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연습을 시작할 때마다 인류학자가 콜센터 상담원의 노동을 관찰한 '사람입니다 고객님'이라는 책을 느리게 읽는 중이다. 콜센터 내의 권력 관계, 상담원들이 겪는 고통과 애환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연출이 이 책에서 묘사된 디테일을 살려 연극을 조금씩 수정해가는 과정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내가 맡은 배역의 비중은 작지만, 복잡한 심경을 지닌 인물. 내가 경험한 어떤 감정의 기억들이 또 이 배역과 만나 뒤섞이려나. '발 연기'일 게 뻔하지만, 맘은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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