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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의 친절로 살아간다.'
오래 전 스페인 영화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볼 때 들었던 이 한마디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영화 안에서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블랑쉬 역할을 맡았던 늙은 여배우가 무대 위, 무대 밖에서 두번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땐 낯선 이의 친절 밖에 의지할 데가 없는 늙은 여배우의 고독이 눈에 밟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영화의 맥락과 무관하게 내겐 점점 더 이 말이 어떤 인간도 완벽하게 혼자가 아니며, 우린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말로 달리 들리기 시작했다.

혼자 떠난 여행지에서 특히 그랬다. 스페인에서 갑작스레 내린 눈으로 추위에 떨 때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아일랜드 할머니는 자기 방 욕조에 가서 따뜻한 물에 몸을 좀 담그라고 난생 처음 본 내게 방 열쇠를 내밀었다. 여행지를 떠올릴 때면 멋진 경치, 맛있는 음식보다 그런 짧은 만남들이 먼저 생각난다. 두번 다시 만날 기약조차 없는 낯선 이들이 서로 스쳐지나가며 전달해주는 온기. 언젠가는 모두 혼자가 된다고 해도, 이 이상 뭘 더 바래, 하는 심정이 되곤 했다.

새해 첫날부터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이유로 시작된 경미한 우울이 밑도끝도 없이 깊어지던 터였다. 넘어섰다고 생각했던 장애물에 또 발이 걸렸다는 낭패감에 아득해지던 때, 그래도 다시 일어서볼만 하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 건 기대하지도 않았던 낯선 이의 친절이었다.

지난달에 베네수엘라의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가 다녀간 뒤 (그 때의 일은 '아브레우 박사 이야기' 로 블로그에 썼다), 그들의 이야기가 영 잊혀지지 않았다. 사람마다 유난히 꽂히는 코드가 따로 있는데 내 경우는 그게 자기 삶 안에서 '다름'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클래식으로 빈민촌 아이들이 다른 세상으로 건너갈 다리를 놓아준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아마존을 뒤져도 책이 없는데 그래도 틀림없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엘 시스테마'에 무작정 메일을 보내 영어로 된 책이 있느냐고 물었다. 어차피 '아님 말고'니까.

다음날 호세 (Jose)라는 사람에게서 답장이 왔다. 이런저런 영문자료를 첨부해 보내면서 베네수엘라에서 출판된 책 영어 번역본이 달랑 2000권 나오고 절판됐는데 자기가 스캐닝을 받아놓았다면서 원하면 보내주겠다고 했다. 보내주면 좋겠다고 답장을 보낼 때만 해도 압축 파일로 만들어 보내줄 줄 알았다.
웬걸, 그 다음날부터 호세의 메일 융단폭격이 시작됐다. 메일 1개에 책 1페이지를 스캐닝한 jpg 파일 1개씩을 첨부해서 잇따라 보내는 거였다. 


그렇게 182 페이지 짜리 책 한 권을 받는데 3일이 걸렸다. 나 같으면 귀찮아서 그냥 없다고 했을 텐데... 낯선 사람에게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알려주겠다는 마음으로 3일간 182번이나 'send' 버튼을 누르는 짓을 하다니. 디지털 문서를 다루는 방법이 서툴러 그렇기도 했겠지만 내겐 꽤나 감동적이었다.
답례로 선물을 보내고 싶은데 주소를 알려달라니까 호세는 감사 메일로 충분하니 선물은 됐다면서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왜 그를 청년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이력을 들어보니 60은 훌쩍 넘었을 것 같다. 호세는 뉴욕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첼리스트로 활동하다가 1980년에 조국 베네수엘라로 돌아갔다.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 신포니카 베네수엘라'에서 20년간 일했고 친구인 아브레우 박사(69)가 빈민촌 아이들의 손에 총 대신 바이올린 활을 쥐어주며 '엘 시스테마'를 만들 때 그를 도왔다.  메일에서 그는 조국 베네수엘라, 친구인 아브레우, '엘 시스테마', 무엇보다 여길 거쳐간 아이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어디 내세우고 인정받으려는 종류의 자부심이라기보다 순수한 기쁨으로 반짝이고, 한 사람에게라도 더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고, "너도 할 수 있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듯한 자부심.

책 한 권을 다 보낸 뒤에도 호세는 계속 베네수엘라에서 '엘 시스테마'를 다룬 글들을 영어로 번역해 내게 보내주고 있다. 내 메일함은 '엘 시스테마' 온라인 데이터베이스가 되어버렸고 나는 아마 베네수엘라 바깥에서 '엘 시스테마' 관련 자료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사람 중 하나가 되지 않았나 싶다. 오늘도 컴퓨터를 끄기 직전 메일함을 열었는데 호세가 보낸 '엘 시스테마' 관련 메일이 2개 더 눈에 띄었다. 빙그레 웃음이 나와서 이 글을 쓴다. 이렇게, 낯선 이의 친절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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