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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 마음 대청소. 저녁에 책장과 너저분하게 널린 글 쪼가리들 정리하던 중 2월 코펜하겐 출장 다녀온 뒤 끼적이다 만 메모를 발견. 서울에 돌아오기 전 반나절 여유 시간 동안 머물렀던 해방 구역 크리스티아니아에 대한 메모다. 아이폰을 뒤져보니 사진도 몇 장 있다. 기회가 되면 한 번 살아보고 싶은 곳. 잊기 전에 추억 삼아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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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펜하겐 안의 해방 구역, 크리스티아니아는 입구부터 범상치 않았다. ‘크리스티아니아’ 입구를 들어선 뒤 돌아보니 반대쪽엔 ‘당신은 지금 EU로 나가고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우린 EU 밖의 자유구역’이라고 선포하는 셈이다. 마을 안 담벼락엔 누군가가 "International"에 반대되는 의미로 “Outernational”이라는 낙서를 휘갈겨 써놓았다.

‘도시 속의 도시’라 할 크리스티아니아는 1971년 빈집 점유 운동을 벌이던 예술가들, 젊은 사회주의자들, 히피들이 버려진 군사 병영의 낡은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공동체 마을이다. 다르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 공동체적 생활 방식과 자유를 좇아 만든 코뮌으로 40년째 독특한 자치 실험이 진행되는 곳이다. 몇 집이 모인 작은 단지쯤이려니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주민이 천 명이 넘는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다. 거주자의 다수가 불법체류자들이라서 그렇다고 하는데, 마을 초입의 일부 모습으로 동네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거리의 모든 벽을 가득 채운 그라피티들, 기기묘묘한 차림새의 사람들, 대마초를 파는 노점상들. 평범한 거리에서 낯설거나 금지된 행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불온한 문화구역 같다.

입구 근처의 Info cafe에서 산 안내책자는 이곳을 ‘소외된 자들의 천국(Loser's paradise)’이라고 소개했다. 가난한 사람들, 이민자, 연금생활자, 방랑자들처럼 가진 것 없고 머물 곳 없는 사람들이 여기서 안식을 찾는단다. 그들은 이곳에서 이른바 민주주의 전통적 기준인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지 않고 모든 결정을 집단적으로 내리는 합의민주주의에 기반해 40년간 마을을 운영해왔다. 사회를 조직하는 대안적인 방식이 지속 가능하다는 것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입증한 셈이다.

마을의 자치구조는 공동회의(Common Meeting), 지역회의, 회계담당자들의 회의, 상인들 회의, 거주자 회의 등 여러 단계의 회의들로 이뤄져 있다. 15개로 나뉜 지역에서 자치 회의는 매달 한 번씩 열리는데 여기서 의견의 불일치가 해소되지 않으면 가장 상급이자 재판정의 역할도 하는 공동 회의로 안건을 가져간다.
이곳에 가장 먼저 등장한 자치의 방식은 공동 자금이었다. 처음엔 담뱃갑에 돈을 모아두었던 것이 커져서 지금은 사업자들이 내는 돈, 임대 비용 등을 모아 세금을 납부한 뒤 자치 비용으로 쓴다. 마을 안에선 자체 화폐를 발행해 쓰고 있다. 불온한 이미지와 달리 90년대부터 한 번도 세금을 거른 적이 없어서 정부로부터 “모범 납세시민” 호칭을 받기도 했단다.
공동체의 가치는 거주에까지 영향을 끼쳐서 이 마을에선 누구도 집을 소유할 수 없다. 빈 집이 생기면 격주간으로 발행되는 마을 소식지에 싣고 지원자를 받는다. 지원자는 해당 지역의 주민과 먼저 만나야 하고 적합하다고 주민들이 합의해야 입주할 수 있다.
이곳에선
친환경 실험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자동차 통행을 금지하고 버리는 물건의 90%를 재활용하는 녹색 지대에서 새로운 자치 실험이 지속되고 있다. 친환경, 유기농 음식도 유명해서 이곳의 유기농 식당 ‘스피세로펜(Spiseloppen)’은 유럽 전역에서 손꼽힌다고 하는데, 이날 안타깝게도 문을 닫았다.

덴마크 정부는 끊임없이 이 구역을 없애고 주택단지로 개발하려 시도하지만 40년 투쟁의 역사에서 지원 세력도 만만치 않다. 이 마을이 사회적 실험으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여론도 크고 왕립예술아카데미 같은 기구들도 이를 지지한다. “다양성을 존중받을 권리를 위한 공공 퍼레이드”처럼 다른 나라의 소수자 차별 정책에 항의하는 퍼레이드도 자주 열린다. 
이 마을의 이미지를 복잡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논쟁거리를 만들어내는 껄끄러운 이슈는 마약이다. 비교적 관대하다고 알려진 덴마크 정부도 80년대 초반부터 끊임없이 이 마을을 없애려 시도했는데 가장 큰 이슈는 마약이었다. 90년대에 경찰이 마을을 무력으로 없애려 시도해 큰 논쟁이 일었던 진압 작전도 마약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 마을 사람들은 굴하지 않고 대마초와 같은 경성 마약의 합법화를 줄기차게 지지한다. 

눈에 띄는 건 이들이 비난에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80년대 초반, 이웃나라 스웨덴이 크리스티아니아가 북유럽의 마약의 온상이라고 비난하자 이들은 논리로 맞서는 대신 “스웨덴, 사랑해요"라는 구호를 내걸고 스톡홀름과 말뫼 등 스웨덴 주요 도시에서 퍼레이드와 전시를 열었다. 2000년대 초반 덴마크 보수정권이 이 마을을 없애려 시도할 땐 유럽 전역의 그라피티 예술가들을 불러와 그라피티 축제를 벌였다. 그 즈음 마약 거래가 문제가 되자 내부적으로 강성 마약 판매를 단속하는 것과 함께 크리스티안하운 현대미술관에 임시 대사관을 열어 아름답고 그림이 풍성한 마을 풍경을 보여주는 전시회를 열었다. 예쁘게 장식한 마약 판매 부스를 국립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엄숙한 도덕적 이슈에 장난기 가득한 아름다움으로 맞서는 작전이라니, 그 천연덕스러움이 가장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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