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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하면 ‘기승전스위스’ 타령을 했다. 내 또래와 만날 때면 아픈 부모의 돌봄이 자주 화제에 올랐는데 근심 섞인 대화는 ‘나도 그렇게 되면 어쩌나’로 이어졌고, 답 없는 수다는 곧잘 ‘우리는 나중에 안락사가 가능한 스위스로 가자’는 결론으로 치닫기 일쑤였다.

농반진반인 그 말에 담긴 절반의 진심은 전적으로 남에게 삶을 의탁해야 하는 상황을 겪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사랑하는 이들을 알아보지 못한 채 자신의 힘으로 먹고 배설하지 못하는 비참을 견디느니 내 손으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 소망이 선택에 대한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건강하고 자기관리에 성실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진 뒤부터다. 평소 자율성의 상실을 끔찍하게 여기던 사람이 순식간에 가장 피하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제3자가 되어 자신을 본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슬퍼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차라리 죽을 수도 없다면? 돌이킬 수 없는 뇌 손상을 입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한순간도 움직일 수 없게 되어버린 아버지의 삶에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주어의 자리에 아버지 대신 나를 놓고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질문을 던졌지만, 답이 궁했다. 답은커녕 ‘기승전스위스’를 들먹이던 내 마음속엔 ‘그런 삶은 무의미하다’라는 두려움이 있지 않았던가?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함께 나 자신을 ‘선택하는 주체’로 여겨온 자아상에도 금이 갔다. 삶에서 나쁜 일들은 기습처럼 들이닥치고 그 무엇도 통제할 수 없을 때가 온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어떻게 반응하느냐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상태는 경과를 예측하기 어려웠고 안정적인가 싶으면 새로운 증상이 나타났다. 그 기복에 따라 가족 모두의 감정도 롤러코스터를 타며 덧없는 기대와 체념 사이를 수없이 오갔다. 외부의 도움 없이 가족이 돌봄을 전담해야 했다면 진작 지쳐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기적 같은 회복은 역시 없었고 내가 사는 세상으로 아버지의 의식을 되돌리려는 노력을 포기할 무렵, 아버지의 두서없는 말과 행동에 깃든 희미한 질서가 눈에 띄었다. 자기 삶의 역사에 대한 일관된 서술은 잃어버렸을지언정 몸에 밴 습관과 특징들은 그대로였다. 아버지답게 끊임없이 사람들의 밥을 챙기고, 일방적 지시에 따르기를 거부했다. 때론 가족을 헷갈려 했으나 밖에 호랑이가 있다고 안절부절못하는 황당한 걱정에도 자식들에 대한 염려가 묻어났다. 내가 좋아했던 유머 감각, 참기 힘들었던 고집불통은 아버지의 고장난 뇌가 만들어낸 기묘한 세계 안에서도 여전했다.

인지능력의 상실은 자아의 상실, 곧 삶을 잃어버리는 거라고 생각해왔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에서 공동저자 이지은은 오랫동안 치매 돌봄의 현장을 연구해온 학자들의 발견을 소개하며 “자아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어떤 것들은 치매로 인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이전의 삶의 흔적들을 가진 몸의 사소한 행동들이 사실은 그 사람의 삶을 이어가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사람의 몸은 그저 손상된 뇌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에는 미국 인류학자 자넬 테일러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겪으며 깨달은 통찰이 실려있다. 테일러는 딸을 알아보지 못해도 친근한 방문객으로 맞이하고 체화된 습관이 여전한 어머니를 대하며 “앞뒤가 맞지 않지만 어떻게든 이어지는 어머니와의 대화 속에서 대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의사소통’이 아니라 서로 말을 ‘주고받는’ 제스처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누군가를 하나의 인격, 혹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인지능력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그 사람에 대해, 그리고 그 사람과 내가 주고받는 제스처들에 대해 내가 기울이는 관심, 무의미해보이는 그 사람의 몸짓들이 의미를 갖게 하는 관계와 돌봄의 제스처”라고 말한다.

아버지와 이전과 같은 의사소통은 불가능해졌지만 서로 어긋나는 문답으로라도, 끄덕이는 고갯짓이나 눈빛, 손을 잡고 살짝 힘을 주는 것으로도 ‘대화’가 가능하다. 아버지의 혼란에 맞춰 반응하고 뜬금없는 ‘아무 말’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아버지와 함께 웃거나 슬퍼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런 상호작용이 아버지의 현재의 삶을 구성한다. 돌봄과 관심을 지속적으로 쏟을 수만 있다면 이 상태로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취약한 시기가 의미 있는 삶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관계’를 통해 아버지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면서도 다른 한편, 이 상황 자체를 좋아할 수 없는 딜레마는 여전하다. 아무리 미화해도 돌봄은 진이 빠지는 일이다. 돌봄의 사회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존엄한 의존은 모두의 미래가 되기 어렵다. 소멸을 향해가는 긴 과정을 지켜보는 일도 버겁다. 좋고 나쁨으로 양분되지 않는 복잡한 마음을 납덩이처럼 안고 지내다 가끔 아버지와 ‘통했다’고 느끼는 짧은 순간들이 찾아오면 이 상황의 비애를 잠시 잊을 뿐이다.

나와 달리 과감한 어떤 딸은 아버지를 여러 번 죽이는 실험으로 복잡한 마음을 다스렸다. 미국 촬영감독 커스틴 존슨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에서 치매 초기에 들어선 아버지가 다양한 방식으로 죽는 장면들을 연출해 보여준다.

위험한 상황 묘사는 대역배우들이 돕지만, 감독의 아버지는 매번 위에서 떨어진 기물에 맞아 죽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죽고, 공사장 철근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장면들을 직접 연기한다.

처음엔 이게 무슨 지독한 농담인가 싶었는데, 보면서 점점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려지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촬영에 임하는 아버지는 스태프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종 유쾌하다. ‘죽은’ 뒤엔 매번 부활해 좋아하는 것들로만 꾸민 사후 세계를 즐기고, 자신의 장례식을 지켜본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끌어들여 그에 압도되지 않고 기꺼이 마주한다.

취약함을 드러내고 의존하는 것은 피해야 할 수치가 아니다. 죽음은 어떤 결단이나 치료해야 할 질병이 아니라 무자비한 자연일 뿐이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눈에 띄게 쇠약해지던 이 아버지가 자기 몫의 불가피성을 대면하는 방식이었다.

촬영 도중 딸이 “어떤 사람들은 상태가 안 좋아지면 삶을 포기하려고 한다”고 말을 건네자 아버지는 “난 아냐. 사는 게 좋거든”이라고 응답한다. 다시 딸이 “(알츠하이머 치매를 오래 앓다 먼저 세상을 떠났던) 엄마처럼 소통을 못하게 되어도 살고 싶다는 말씀이신가요?”하고 묻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기꺼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글쎄……. 적어도 ‘기승전스위스’타령을 더는 하지 않게 될 것 같다.

작가· 〈이상한 정상가족〉 저자

한겨레신문 기고 ( www.hani.co.kr/arti/opinion/column/975366.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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