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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자료사진
“사랑에 빠져 행복한 여자는 수플레를 태우지만, 사랑 때문에 불행한 여자는 오븐 불 켜는 것을 잊어버리지.”

- 영화 <사브리나>에서 파리의 늙은 요리사가 사브리나에게 -

맞는 말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단 한시도 연인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고 들뜬 마음에 실수 연발이기 쉽지만, 사랑을 거절당해 불행한 사람은 무엇을 해도 무기력하다. 오븐 불 켜는 것은커녕 밥숟가락도 들기 싫어지는 법이다.

영화 ‘사브리나’(DVD·파라마운트)를 본 건 2년 전 미국의 한 대학 도서관에서였다. 사소한 일로 풀이 죽은 채 DVD 열람실에 갔는데 재미있어 보이는 DVD는 죄다 대여 중이었다. ‘그럼 그렇지, 나한테 뭐 좋은 일이 있을라고’하면서 이 오래된 흑백영화를 골랐다.

영화를 보는데 문득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코미디 영화인데 소재 자체는 우울하기 짝이 없는 거다.

사브리나는 엄청난 재벌가에서 차를 모는 운전사의 딸이다. ‘하녀’나 마찬가지 신분인 사브리나는 재벌가의 바람둥이 둘째아들 데이비드를 짝사랑하지만 데이비드에게 사브리나는 그냥 ‘어떤 사람(Somebody)’일 뿐이다. 사브리나는 9세 때 롤러스케이트를 타다 데이비드가 자기에게 키스를 했던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반면 데이비드는 (당연히) 그 일을 기억조차 못한다.

데이비드가 흥청망청 벌이는 파티를 몰래 훔쳐보며 애를 태우던 사브리나는 짝사랑의 절망을 참을 수 없어 자살까지 시도한다. 딸의 증세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브리나의 아버지는 그녀를 파리의 요리학교로 억지로 쫓아버린다….

비극적 멜로드라마에 더 어울릴 이야기 같지 않은가? 이 칙칙한 소재가 경쾌한 로맨틱코미디의 재료라니. 같은 이야기가 비극으로도, 희극으로도 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면서 희한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가령 살면서 겪는 일 가운데 코미디로 다시 진술하기 어려운 ‘순수한 비극’은 얼마나 될까. 불행한 사건을 비극적 포즈로 맞는 태도가 꼭 인생에 대해 진지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기연민에 빠져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함정일 수도 있다.

해리 포터가 다닌 마법학교에서도 그런 걸 가르친다.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새로 부임한 루핀 교수의 첫 수업 주제는 낡은 옷장 안의 괴물 보거트를 물리치는 마법이었다. 옷장 문을 열면 튀어나오는 보거트는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괴물인데,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는 대상으로 변해 겁을 준다는 것이 특징이다.

보거트를 쫓아버리는 마법은 웃음소리였다. 루핀 교수는 학생들에게 “각자 가장 두려운 것을 생각하고 그것이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시킨다.

이 마법은 효험이 셌다. 학생들이 차례로 주문을 외자 표독한 스네이프 교수는 레이스가 달린 할머니 옷을 입고 뒤뚱거렸고 미라는 풀린 붕대에 발이 걸려 넘어졌으며 무서운 독거미는 8개의 발에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사정없이 허우적댔다.

공포의 대상을 순식간에 물리치게 만든, 루핀 교수가 가르쳐준 주문은 이렇다.

‘리디큘러스!(Ridiculous·웃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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