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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2모작’은 이제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년퇴직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 ‘조퇴’를 통해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중년도 늘고 있습니다. 35~55세에 인생전환을 이뤄낸 평범한 사람들의 조언을 들어보는 [중년의 터닝 포인트]를 주 1회 연재합니다.


 

Before: 자동차 엔지니어

After: 미국 FDA 승인 받은 전통음식 프랜차이즈 (주)미당 추어탕 대표

Age at the turning point: 36



11년 전 자동차 엔지니어였던 전정욱 씨가 10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추어탕 집을 차리려 준비할 때, 하필 외환위기가 시작됐다. 말리던 주변 사람들은 “그것 봐라”는 듯 그를 딱하게 여겼다.

경제상황이 그 때보다 더 힘들다는 2009년. 그는 지금 48개 가맹점을 둔 프랜차이즈 미당 추어탕의 대표로 성장했다. 2006년엔 국내 프랜차이즈 업체 중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식품안전승인을 받고 포장 추어탕을 미국에 판매하고 있다.

전 대표 (47)는 “음식 산업은 결국 신뢰의 산업이고 오너의 마인드가 모든 걸 좌우한다”면서 “정 할 것 없으니 음식점이라도…, 같은 생각으론 100% 망한다”고 단언했다. 그는 어떻게 전환에 성공했을까.


1. 스스로에게도 명분이 서는 일을 찾아야 한다


대학에서 기계 공학을 전공한 그는 자동차 회사 엔지니어로 일하다 97년에 사표를 내고 이듬해 추어탕 집을 차렸다.

“직장생활 10년차 쯤 되었을 때, 이 회사에서 내 미래가 어떨까 그려봤어요. 사장이 될 것도 아니고, 언젠가 홀로서기가 불가피하다면 더 나이 들기 전에 하자고 결심했지요.”


돈도 돈이지만 스스로에게 명분이 서는 일을 찾고 싶었다. 고민 끝에 “가업을 계승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의 부모님은 전북 남원에서 3대째 추어탕 집을 해왔다. 이미 부모님은 가게 문을 닫은 상태였지만 그는 명맥이 끊긴 가업을 다시 잇겠다고 결심했다. 단순한 ‘추어탕 집’이 아니라 ‘전통음식 발굴, 브랜드화’를 목표로 설정했다.


“쉽게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에게 명분을 부여하며 이게 ‘해야 할 일’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만약 퇴직 후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했더라면 이렇게 못했을 거예요. 음식점은 손님에게 무조건 맞춰야 하는 직업이거든요. 주인이 잘 나면 안 됩니다.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은 의욕적이니까 자신을 낮추지만 떠밀려서 한 사람들은 그걸 못하더라고요. 떠밀려서 하는 것과 스스로 선택하는 것, 이 태도의 차이가 모든 걸 결정해요.”


2. 좋은 조력자를 만나는 게 중요하다


음식점이 성공하려면 일류 시설에 일류 주방장을 쓰는 ‘규모의 경제’ 혹은 맛으로 승부해야 한다. 자본이 모자란 그는 후자 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 2년간 주말마다 추어탕의 본고장인 남원에 내려가 요리를 배우고 추어탕 집을 순례했다. 그의 행운은 스승을 잘 만난 것. 부모님 집 주방에서도 일했던 노인에게 ‘맛을 그리는 기술’을 배웠다.


“한식에는 고추장 된장 마늘 등 7대 재료가 있는데 탕을 먹어보고 그 안에 7대 재료 중 무엇이 들어갔는지를 알아내야 해요. 특히 탕은 이미 끓여 동화된 상태라 재료 감별이 어려워요. 스승께 집중적으로 배운 게 이 기술입니다. 간만 볼 줄 알면 요리 80%는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배합을 알고 무엇이 부족한지 맛을 그릴 줄 알아야 합니다.”


탕 요리의 핵심인 열처리도 노인에게 배웠다. 추어탕 집을 순례할 때 어떤 집의 된장 맛이 유난히 강해 이유를 물으면 주인도 대개는 “된장을 한 숟갈 밖에 안 넣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머리를 긁적였다. 비밀은 열처리에 있었다.


“추어탕에서 된장 맛은 입으로 느끼게 해야지 냄새가 나면 안 되거든요. 추어탕에 된장을 넣어도 냄새가 안 나는 온도가 360도라고 치면 그걸 불꽃을 보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 역시 스승께 배운 핵심 기술이죠.”


3. 어떻게 남들과 다르게 할 것인가


98년 수원에 추어탕 집을 차릴 때 그의 원칙은 ‘천연재료’로 승부하겠다는 것. 멸치 표고버섯 다랭이를 우려 만든 천연양념을 썼고 젓갈도 가거도에서 소금으로만 절인 천연젓갈을 썼다. 이러다보니 원가 상승은 당연지사. 당시는 외환위기가 들이닥쳐 모든 추어탕집이 가격을 1000원씩 깎던 때였다. 그는 고민 끝에 되레 가격을 7000원으로 올리는 모험을 감행했다.


“저도 깎으려고 궁리를 많이 했어요. 다 내리는데 혼자 올리는 결정을 하기가 쉽겠어요. 하지만 천연재료를 포기하지 않으면 최소 원가는 7000원이었고, 내 방식을 버리느니 대신 1000원어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차별화를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직접 빚은 약주, 추어로 만든 전을 서비스하기 시작했지요.”


그의 전략은 주효했다. 처음에 하루 20만~30만원이던 매출이 1년 반 만에 하루 250만 원 선으로 늘었다. 차별화를 위해 추어 만두, 어린이 추어 돈가스 등 신규 메뉴도 계속 개발했다.


“업종 선정도 중요합니다. 저는 차별화 전략의 성공이 추어탕집이라 가능했다고 봐요. 김치찌개와 달리 추어탕은 기호식품이고 고객의 충성도가 높은 마니아 문화이거든요. 입소문이 나면 손님들이 1천원 차이는 무시하고 결국 다시 돌아오시더라고요.”


2005년 프랜차이즈를 시작할 때도 그는 남들과 다른 길을 갔다. 대부분의 프랜차이즈가 본사 물건 공급 수준을 30% 선에서 맞추는 것과 달리 그는 처음부터 18억 원을 들여 공급시설을 짓고 본사 물건을 100% 공급했다.


“몇몇 친구들에게 기술 전수를 해줬는데 다 실패했어요. 조리법만 배우고 맛 관리가 안 되니까 경쟁에서 지는 거죠. 일괄적 품질관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공장을 짓고 본사에서 직접 제품을 만들어 냉장 상태로 매일 배송하는 방식으로 바꾸었습니다.”


4. 끈질기면 길이 트인다


2006년에 그는 미국 진출로 눈을 돌렸다. 탕 문화가 해외에서도 먹히는지 실험해보고 싶었고 재미교포들도 주요 공략 대상이었다. 포장 추어탕을 대형 콘테이너로 수출하려면 미국 FDA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대행업체에 맡겼더니 6개월간 진전이 없었다. 하도 답답해 그는 동시통역사를 구해 매일 밤 FDA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FDA의 요구는 온도별로 제품 영양소가 얼마나 파괴되는지를 조사해 제출하라는 것. 식품과학 관련 연구소에 갔더니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해 직접 하기로 결심했다.


“석 달 동안 공장에서 실험하고 거의 매일 FDA에 전화해 설명하면서 ‘식품 가열온도에 따른 영양소 변화’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했더니 ‘그만하면 됐다’고 하더라고요. 실제 자료보다 기준을 지키기 위해 공정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를 보려고 했던 것이래요. 추어탕을 승인 받고난 뒤 대게탕 시래기국 황태탕도 일사천리로 승인 받았죠.”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그는 “물건을 콘테이너에 실어놨으니 무작정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다 안 되면 말더라도…. 끈질기게 추구하다보면 일이 되는 방식이 다 있더라”고 들려주었다.


그는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200개까지 늘리는 게 목표다. 강진 장흥에서 사라져가는 막걸리 초장을 도입해 키조개무침으로 상품화하는 등 전통음식 발굴에도 주력하고 있다. 이제 천직을 찾은 것 같으냐고 묻자 그는 “천직? 그런 건 모르겠다. 다만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대답했다.

(이 시리즈는 [터닝 포인트] 블로그에도 동시 발행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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