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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그는 스파이였고,2009년 그는 스파이가 아니다. 그때 그의 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 다큐멘터리 영화 '경계도시2'에서 -
영화를 보고 1주일쯤 지난 뒤 위의 내레이션을 찾고 보니, 내가 기억하고 있던 대사와 달랐다. 엉뚱하게도 내 머릿속에는 위의 내레이션이 "그때 우리는 과연 무슨 짓을 한 것일까"로 남아 있었다. 그의 죄보다는 우리의 죄로 더 선명하게 마음에 남은 영화라서 그랬던 걸까.
이 영화를 볼지 말지 한참 망설였다. 2003년 입국한 송두율 교수가 북한 조선노동당 서열23위 김철수냐 아니냐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해방이후 최대거물간첩'딱지를 붙이더니 급기야 가짜교수의혹까지 제시하며 미친 듯 몰아붙이던 검찰과 언론의 마녀사냥이 못마땅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선 송 교수에 대해 '그러게 왜 거짓말을 하고 그러나…'하는 불신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머릿속 생각까지 검열하는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그 법에 의해 한 사람이 만신창이가 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무감각했다. 경계인으로 살고자 했던 사람이 남과 북의 한쪽에서는 용인되고 다른 한쪽에는 발도 디딜 수 없었던 그간의 정치적 상황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보다는 지식인 전반에 대해 갖고 있던 회의와 불신을 그에게서도 확인받는 듯한 느낌으로 상황을 시니컬하게 지켜봤을 뿐이다. 그 뒤, 그 사건을 잊었다. 2008년 대법원은 송 교수에게 제기된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는데, 그 선고 내용조차 영화를 보고서야 알았다.
한 사람의 머릿속을 단죄하고 발가벗긴 뒤 내팽개치고 잊어버리는 이 잔인한 건망증...그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부끄럽고 힘이 들었다. 그를 초대한 소위 '진보 진영'조차 송 교수가 평생 견지해온 '경계인'을 우스꽝스러운 개념쯤으로 취급하면서 그에게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장면에선 차라리 눈을 감았다. 송 교수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언론의 횡포는 내가 그 업계를 떠났다고 해서 남의 일처럼 바라보기 어려웠다. 같은 사건이 2010년에 벌어졌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아마 더 하면 더 했지 나아지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7년 전의 일을 다룬 영화를 보는 일이 불편하고 괴로운 이유는 그 일이 얼마든지 재연될 수 있다는 가능성때문만은 아니다. 영화는 2003년에 내가 느꼈던 불편함, 내 안의 레드 콤플렉스를 다시 건드리면서 너는 얼마나 달라졌느냐, 달라질 것인가를 묻고 있었다. 카메라가 비추는 것도 결국은 송 교수 사건의 흐름보다는 그 사건을 보며 불편해하고 거슬려하고, 이곳 아니면 저곳을 강요하는 이분법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그를 무릎 꿇린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다.
1주일 전쯤 영화를 보고 난 뒤 뜬금없이 떠올라 머릿속을 빙빙 도는 말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홍상수 감독의 저 유명한 대사,"우리, 인간은 못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였다. 인간이 될 가능성은 없더라도 적어도 괴물은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덕목을 하나만 꼽으라면 수치심일 것이다.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이 영화를 더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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