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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sanna 2010. 5. 23. 01:14

나는 네가 되고 싶어.
너처럼 강인할 수 있다면, 너처럼 날아오를 수 있다면,
아니 다른 무엇보다,
너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춤추게 만들 수 있다면.....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를 보다.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나 번번이 거절 당하던 유약한 왕자가 꿈 속에서 선망한 백조. 강하면서 아름답고, 가볍게 날아오르면서도 압도적인 힘이 넘치는 사내. 백조는 죽음으로 달려가던 왕자를 가로막아 삶을 향해 돌려세우지만, 사랑을 향해 내밀던 왕자의 손을 조롱한다.

끝내 나는 네가 될 수 없듯, 왕자는 살아서 그가 될 수 없었다. 백조처럼 강해지고 싶고, 사랑 받고 싶었던 유약한 청년의 꿈은 죽음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었다.
 이야기에서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외디푸스 콤플렉스, 동성애적 코드보다, 내게는 이 무용이 끝내 가닿을 수 없는 대상을 선망하던 자의 비극으로 다가왔다.  

벗은 몸에 깃털바지만 입은 남자 무용수들의 군무는 느슨하게 등받이에 기댄 몸이 저절로 긴장될만큼 보는 이를 압도하는 힘이 있다. 무대에서 좀 떨어진 자리였는데도 남자 무용수들이 백조의 날개짓을 할 때, 잔 근육의 꿈틀거림은 선명하게 보였다. 사람의 몸만큼 아름다운 표현 도구가 또 있을까 싶다.

백조의 긴 목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꼬고 팔 동작으로 새의 몸짓을 표현할 때마다 두드러지는 근육의 움직임들, 맨발로 무대를 쿵쿵 울리는 발소리, 위협적인 동작을 하며 무용수들이 함께 내뱉던 ‘하!’ 숨소리,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상체.... 이야기의 틀을 새로 짠 것도 신선했지만 매튜 본 각색의 가장 큰 힘은 무엇보다 클래식한 레퍼토리를 이토록 황홀한 육체의 향연으로 바꿔놓은 것이 아닐까. 뉴욕에서 이 공연을 봤던 동생은 “맨 앞줄에 앉아 무용수들의 땀방울이 객석에까지 튀는 상태에서 봐야 제 맛"이라고 촌평을 했다. 아, 땀방울…. 맨 앞자리 표를 사는 건데. ㅠ.ㅠ
- 공연을 보며 웃겼던 것. 백조 군무에 감탄하다가 한 마리(?!)씩 찬찬히 관찰하면 다 제각각이다. 깃털바지를 '배바지'처럼 입은 키 작은 백조가 있는가 하면, 너무 말라 뻣뻣한 막대기 백조, 군살없이 늘씬한 백조들 틈에서 유일하게 배에 '왕'자가 보이지 않고 배 부위가 몽실몽실한 백조도 있다. 살이 찐 건 아닐테고 체형이 그런 듯.  

- 공연 시작 전, 차분한 음성으로 흘러나온 LG아트센터의 안내방송이 사람들을 웃겼다. 공연 시작 전에 휴대전화 전원을 완전히 꺼달라는 안내방송을 하면서 이렇게 코멘트. "휴대전화의 진동음이 울리거나 액정의 파란 화면이 깜빡거리는 것만으로도 공연을 하는 사람들에겐 아주 큰 시련과 절망감을 안겨줄 수 있으므로....."  모두 와~ 웃으며 '시련과 절망감'을 따라 읊조리면서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껐다. 목적달성은 아주 훌륭히 한 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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