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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잘 가요, 지붕킥

sanna 2010. 3. 20. 12:50

 

지붕킥이 끝났다…….

충격적 결말로 인한 놀라움과 동시에 나의 겨울을 함께 견디어준 지붕킥을 보내는 서운함 때문에 오늘까지 마감하기로 약속한 일도 눈에 잘 들어오질 않는다.

결말에 무척 놀랐고 김병욱 PD가 관습적이지 않은 마침표 찍기에 너무 골몰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황당하진 않았다. 되레 오래 아팠던 문제들을 건드리는 바람에, 아무리 서운해도 눈물을 펑펑 쏟으며 마지막 회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세상이 호의적일 거라고 턱없이 믿었던 아주 오래 전에는, 너무 좋아했던 사람과의 결과가 함께 하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너무 갑작스러워 황당하기까지 한 방식으로 소중한 사람이 세상을 떠날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몇 년이 지난 뒤에도 ‘그때 ~만 아니었더라면’ 상황이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회한으로 가슴에 멍이 들 거라고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그런 일들은 일어난다. 안치환의 노래였던가, “인생은 내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는 말마따나 그런 일들을 비켜가도록 세상이 유독 내게 호의적일 까닭이 없다. 기대는 번번이 배반당하고 행, 불행은 공평하게 배분되지 않는다. 그런 비극과 뼈저린 회한을 다소 극적인 방식으로 담았다고 해서 지붕킥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어쩌면 웃음의 소재조차 신분의 차이와 가난, 모진 세상살이에서 찾아온 지붕킥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결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라면 ‘시트콤스럽지 않은’ 시트콤이라는 게 유일한 문제였을 것이다.


내가 지붕킥을 처음 만난 건 지난해 말 병원 입원실에서였다. TV를 보지 않는데다 ‘불구경’류의 일들은 죄다 쫓아다니는 게 직업적 버릇인 기자도 더 이상 아닌 터라, 병원에 5일씩 입원할 일이 없었더라면 지붕킥으로 인터넷이 뒤집어져도 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신마취에서 깨어날 땐 기분이 좋지 않다. 안도감은 잠시 뿐, 춥고 목이 마르다. 몸에 박힌 튜브의 이물감도, 머리가 멍한 상태도 싫어서 신경을 딴 곳으로 돌리려고 TV를 틀었는데, 마침 케이블에서 지붕킥 몇 회분을 한꺼번에 방송하고 있었다. 심드렁하게 보다가 키득거리기 시작했고, 정보석이 방귀 때문에 첫사랑과 헤어진 사연에 이르러서는 너무 심하게 웃는 바람에 수술부위가 아파 눈물을 질금거렸다. 그날 이후 낮의 지붕킥 재방송, 밤의 본방을 챙겨보는 게 주요 일과가 되었고, 연말의 스산한 병원 공기에도 별로 우울하지 않았다. 퇴원 이후 예상 밖의 수술 후유증 때문에 한 달가량 집밖 출입을 거의 하지 못했는데, 6개월 전 회사를 그만 둔 ‘심리적 후유증’도 그제야 찾아왔다. 예전 같으면 고민거리를 끌어안고 어떻게든 답을 찾겠노라고 발버둥을 쳤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지붕킥 다시보기 정액권을 사서 하루에 몇 편씩 몰아 보는 중독자가 되어 그 시기를 넘겼다.

그냥 웃고 싶어서 보기 시작했는데, 볼수록 지붕킥은 그저 웃자고 하는 시트콤이 아니었다. 오르기 힘든 나무를 바라보는 속앓이를 버티어내다 치과에 가서야 겨우 눈물 한 방울 흘리는 세경도, 어떻게 해서든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정음도 짠했다. 늘 착하고 당하기만 하던 신애가 너무 미운 해리 때문에 인형을 훔쳤다 돌려놓은 것도 안쓰러웠고, 신애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혼내기는커녕 인형을 사다주며 “너는 많은 것을 가진 아이야”라고 말해주는 속깊은 지훈이 좋았다. 아무도 안 놀아주는 심술쟁이 해리가 빵꾸똥꾸 신애가 쓴 동화를 어서 읽고싶어 신애 대신 멸치를 까며 기다리는 모습도, 으르렁거리던 현경과 자옥이 돌아가신 엄마의 콩국수 이야기를 하며 손을 잡던 날도, 짝사랑하던 세경의 손에 35점짜리 영어성적표가 들려있는 것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내며 저 자신을 쥐어박던 준혁의 수치심도……, 그저 한번 웃고 만 것이 아니라 아, 사람이 저렇게 사는 거지 싶어 마음 짠했던 장면들을 읊자고 치면 끝도 없을 것이다.
성격이 꼬인 탓인지 ‘착하고 맑은 이야기’들을 죄다 싫어하는 터라 지붕킥이 그저 웃음과 감동 일색이었다면 중독에 오래 빠져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돈, 돈 하는 엄마에게 대들며 학교 빼먹고 불쌍한 이전 과외선생의 부친상에 관 들러 가겠다고 큰소리치던 정의파 준혁이 제 버릇 남 못주고 늦잠을 자버려 결국 과외선생에게 “이런, 개자식” 소리를 듣듯, 지붕킥의 사람들은 오롯이 착하기만 하지도, 못되기만 하지도 않았다. 약속 못 지키고 의지박약한 데다 치사하고 쪼잔한 인간들이지만, 서로 뒤엉켜 복닥복닥하는 사이 이들은 서서히 변해갔다. 그렇게 그들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는 게 찡하게 좋았다. 그러다가 나 역시 스스로를 들볶던 문제들을 잊어 버렸던 것인지......, 다시 기운차려 사람들을 만나고 나돌아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지붕킥 중독에서 서서히 빠져 나왔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갔다.

지난 연말부터의 겨울은 내게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시간이 오래 흐른 뒤에도 이 시기를 돌이켜본다면 나는 질병과 우울에 괴롭던 컴컴한 기억보다는 눈 빠져라 지붕킥을 보며 따라 웃고 훌쩍대던 시간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나와 함께 긴 겨울을 견뎌준 지붕킥. 그동안 고마웠어.
잘 가요, 지붕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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