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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엄마의 바나나 우유

sanna 2010. 5. 8. 14:12

며칠 전 어머니가 새벽차를 타고 서울에 오셨다. 병원 검사 결과를 보러 오신 거였지만 엄마는 이 참에 오랜만에 딸들과 함께 수다 떨고 놀 수 있겠다고 들떠 계셨다. 오후 5시 넘어,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 몸이 갑자기 좀 안 좋으신 것 같아서 곧장 밤차로 고향에 내려가셔야 할 것 같다고, 밥을 해놓고 갈 테니 와서 먹으라고 하신다. 그깟 밥, 필요 없으니 더 늦기 전에 어서 가시라고 말하다가 좀 속이 상했다. 밥을 챙기고 걱정해 줘야 할 사람은 난데 왜 엄마가…

늦게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끓여놓은 찌개와 밥 냄새가 집 안에 낮게 퍼져 있다. 냉장고를 열자 탄성이라고도, 한숨이라고도 할 수 없는 짧은 기운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병원에 다녀와 오후 내내 반찬을 만드셨는지 없던 멸치고추볶음이며 오이김치 등이 가득 들어있는가 하면 동생이 좋아하는 생크림 요구르트를 사서 쟁여놓고 바나나 우유까지 잔뜩 사서 넣어두고 가셨다. 평소 잘 먹지도 않는 바나나 우유를 뭐 하러….하다가 어릴 때 생각이 났다.

중학생 때부터 나는 오빠와 전주에서 자취를 했는데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렁각시가 다녀가기라도 한 듯 자췻방이 말끔해졌고 빨래가 팔락팔락 널려 있고 부엌엔 찌개며 밑반찬들이 쟁여져 있곤 했다. 엄마가 다녀가신 거였다. 고향의 아버지와 동생들을 돌봐야 해서 서둘러 일을 마치고 오빠와 내가 돌아오기도 전에 가셔야 했던 엄마의 흔적을 볼 때마다, 나는 그냥 학교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고향에 돌아가 엄마 품에서 살고 싶어서 무릎을 끌어안고 쪼그려 앉아 울었다.

이제 나는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들었는데, 늙으신 엄마는 여전히 시간에 쫓겨 동동거리면서도 기어이 나와 동생이 먹는 냉장고에 바나나 우유까지 쟁여놓으시는 우렁각시다. 예나 지금이나 엄마한테 미안하면 화부터 내는 못된 딸인 나는 전화를 걸어, 아니, 밤차를 탈 사람이 조금이라도 일찍 갈 것이지 왜 쓸데없는 장을 보고 그러냐고, 우리가 무슨 어린 아이들냐고 괜히 짜증을 냈다. 죄책감이 목에 걸려 있어서인지 바나나 우유를 하나씩 마실 때마다 자꾸만 사래가 들렸다.

어버이날. 회사도 때려치우고 딱히 하는 일도 없는데 뭐가 바쁘다고 고향에 내려가지도 않고 꽃바구니 배달로 때우고 말았다. 아침에 전화를 드렸더니 어제 농협에서 카네이션을 주던데 뭐 하러 이 비싼 꽃바구니를 보냈느냐고 가볍게 타박하신다. 못 내려가서 미안해요 어쩌구 하던 내 말 끝에 엄마가 “응, 괜찮아”하면서 소녀같은 말투로 웃으며 덧붙이신 말씀에, 끝내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 딸, 너~무 예쁜 꽃 보내줘서 고마워. 오늘 기분 좋게 잘 지내. 엄마도 그럴게. 사랑한다, 우리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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