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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봉숭아물

sanna 2009. 8. 28. 23:32

제주도에 여행을 갔다가 길가에 핀 봉숭아 꽃잎을 따와 봉숭아물을 들였다.

어릴 때 봉숭아물을 들여 아주까리 이파리로 감싸고 실로 꽁꽁 싸맨 뒤 자고 일어나면 손톱에 예쁘게 물이 들었던 기억이 그 시절의 자질구레한 다른 일들과 함께 되살아나 괜스레 가슴까지 콩닥콩닥해가면서.


봉숭아 꽃잎을 빻아 백반과 섞어야 하는데 집엔 백반이 없었고, 밤에 사러 나가기도 그렇고, 결국 백반 대신 식초와 소금을 섞어 (왜냐고 묻지 마시라. 나도 모른다) 물을 들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손톱엔 슬쩍 기운만 비치고 말았는데 주변 손가락 살이 더 진하게 물들었다. 이건 뭐 로맨틱한 기억을 다시 살아보기는커녕 김장 담그다말고 온 손 형국이로세. -.-;;   

혹시 지울 수 있나 궁금해 뭘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네이버 지식인에게 한번 물어봤다. 나 같은 사람이 여럿 있었던지 뜨거운 소금물에 담가도 보고 칼로 긁어보고 아세톤으로 닦아보고 별 짓 다해도 안 지워진다며 울상인 질문들이 많다. 괜히 찾아봤다 싶은 대답이야 ‘지우려면 아예 하지를 말던가’ 같은 하나마나한 소리부터 시작해 수술 전 환자가 봉숭아물을 들이면 손톱을 뽑는다는 무시무시한 말까지 있다. 초딩들의 헛소리이겠거니 했는데, 수술 중 손 발톱의 색깔로 저산소증 여부를 확인하기 때문에 수술 전 환자는 봉숭아물을 들이면 안 된다는 의사의 코멘트가 실린 기사까지 있다. 참 나…. -.-;;


지하철을 탔는데 고속터미널 역에서 짐보따리를 잔뜩 들고 타서 내 옆 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내 손을 보더니 키들키들 웃기 시작했다.

“여그 손톱 가상에 크림을 쬐께 발르고 허면 되는디…”

아주머니가 집게손가락으로 내 손톱 위에 조그맣게 원을 그리며 말했다. 따라 웃으며 손을 들어 보여주었다.

“그러게 말예요. 손톱에는 물도 잘 안 들었어요”

아주머니가 이번엔 아예 내 손가락을 잡고 들여다보며 웃었다.

“그랑게, 아, 손톱은 멀쩡허구 가상 자리에만 죄다 물이 들었고만이~ 그려도 봉숭아물 들잉거 봉께 촌에서 왔는갑네”

아주머니가 그제야 내 얼굴을 바라보며 반가운 듯 말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엔 누가 고향이 시골이냐고 물으면 내가 촌티가 나나? 하고 슬쩍 삐졌는데 요즘은 촌에서 왔다는 걸 누가 알아봐주면 괜히 반갑다. 이젠 서울에서 산 기간이 시골에서 산 기간보다 긴데도 말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내가 그닥 많이 변하진 않았구나' 하는, 얼토당토않은 안도감 같은 걸 느낀다고나 할까. 참 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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