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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음악의 약속

sanna 2009. 8. 2. 23:59

후배 블로그에서 보고 따라쟁이 컨셉으로 퍼온 공연 동영상. 
멕시코 작곡가 아르뚜로 마르께스의 ‘단쏜 2번’. 요즘 내가 열공 중인 베네수엘라의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의 연주다. 지난해 말 한국에 와서 유명세를 탄 그 ‘엘 시스테마의 가장 큰 오케스트라다. 지휘자는 ‘엘 시스테마’가 배출한 최고의 스타인 구스타보 두다멜.

며칠 전 이들을 다룬 DVD를 본 뒤 계속 콧노래로 흥얼거리던 곡이었는데 오늘 무심코 들른 후배 블로그에서 또 만나다니, 이건 무슨 계시인가, 하는 엉터리 생각도 해본다. 심지어 오늘 본 영화 ‘업’에서도 비행기 티켓에 선명히 찍혀 있던 ‘베네수엘라’ 글자가 유독 눈에 띄더라는…. -.-;; (옆길로 새면 ‘업’은 하도 기대가 커서 그랬는지 초반 30분가량을 지나고 난 뒤부터는 별 감흥이 없고 그저 그랬다. 픽사 스튜디오가 다른 주옥같은 영화들에서 보여준 스토리텔링 능력을 생각하면 이건 그냥 범작이다.)


이 동영상에서도 DVD에서 본 얼굴들이 눈에 띄어 혼자 반가웠다. 가령 동영상의 1분30초 어름에 화면에 잡힌 바이올리니스트는 23살 난 조안나 시에르랄타다. (이름이 Jhoanna 인데 스페인어로 어떻게 발음하는지 몰라서 일단 조안나로…) 그녀는 금으로 된 목걸이 같은 걸 하고 나갔다간 곧장 빼앗기고 만다는 우범지역에 산다. 집 맞은 편 산등성이의 판자촌을 가리키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곳의 아이들은 경찰의 보호를 받거나 오케스트라의 보호를 받거나 둘 중 하나”라고.

그런가하면 5분46초 어름에 잠깐 솔로 연주자로 등장하는 플루티스트는 카트리나 리바스. 그녀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개인 악기를 살 돈이 없어 오케스트라가 대여해주는 악기로 연주를 배웠고, 총을 든 괴한들이 출몰하는 지역에서 버스를 타고 오가며 “위험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면서” 아슬아슬하게 산다.


그런 이들이 “음악은 내 삶이고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말할 때, 그 울림은 좋은 환경에서 자신의 악기를 갖고 개인지도를 받으며 성장한 음악가들의 열정과는 사뭇 다르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조안나는 오케스트라를 통해 바이올린 연주 뿐 아니라 사람을 빈부, 피부색, 나이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대하는 법을 배웠다고도 했다.

음악이 어떻게 이들을 바꾸고 성장시킬 수 있었을까. 음악은 본디 위대하다는 흔한 설명은 나 같은 문외한에겐 별 설득력이 없다. 특수한 상황에 놓인 한두사람이 아니라 특별히 음악적으로 두드러질 것도 없던 카리브해의 한 나라에서 30년간 무수한 사람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었던 음악의 힘, 그게 도대체 뭐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했을까. 요즘 내가 알고 싶어서 공부하는 것들이다.
DVD에서 이 '단쏜 2번'이 흘러나올 때 화면은 카라카스의 허름한 뒷골목을 걸어가는 어린 소녀의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들이 돌아다닐법 하지 않은 길거리를 볼품없는 옷차림새로 걸어가던 소녀의 찰랑거리던 검은 머리를 보면서, DVD의 제목인 '음악의 약속'과 가장 잘 어울리는 화면이 아닌가 생각했다. 왠지 저 아이 곁에 음악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단쏜의 처연한 곡조가 보이지 않는 보호막처럼 그 아이를 부드럽게 휘감아 지켜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 묘한 안도감을 주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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