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작가를 만났습니다. 세상에 소설가는 차고 넘치지만, (좁디 좁은 제 식견을 감안하여도) 이 분만큼 "이야기꾼"이 썼다는 느낌이 든 소설은 오래간만에 봅니다.
잔뜩 설렌 김에, 정유정 작가를 두 차례 만나 제 책 '내 인생이다'에실은 인터뷰를 독자 서비스 차원 (^^;)에서 전문 게재합니다. 꽤 길어서 접었습니다. ---------------------------------------------
운명이 내 삶을 침몰시킬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정유정: 간호사에서 소설가로
1980년 5월, 시가전이 벌어지던 광주에 공수부대가 진입하던 날이었다.
방 10개가 주르륵 붙어있던 기다란 한옥에서 하숙을 하던 대학생과 어른들은 출정식이라도 하듯 마당에 함께 모여 번개탄을 피워 삼겹살을 구워먹고 소주를 마셨다. 그러고는 한 명 뿐이던 여고생에게 “집 잘 보라”고 당부한 뒤 굳은 얼굴로 모두 트럭을 타고 떠났다. 밤새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겁에 질려 어쩔 줄 모르던 여고생은 대학생이 묵던 옆방에 들어가 책을 하나 골랐다. 재미없는 책을 보면 잠이 올까 싶어 고른 책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그 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는 기억에 없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총소리가 그쳐 있었다. 어른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창문에 쳐둔 이불을 들추고 밖을 내다보니 새벽이었다. 희뿌옇게 밝아오던 하늘, 깊은 정적에 휩싸인 새벽녘의 거리를 바라보던 여고생에게서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2009년 장편소설 "내 심장을 쏴라"로 1억 원 고료 제5회 세계문학상을 탄 정유정 씨는 자신이 왜 작가가 되고 싶은지를 고등학교 1학년이던 그날 알았다고 했다. 그 울음이 답이었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여고생의 몸과 마음을 꿈결처럼 홀리고 잠시나마 현실의 공포를 잊도록 해준 소설, 그렇게 울게 만들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 후 한시도 소설가의 꿈을 잊어본 적이 없지만, 자신의 꿈과 마주하기까지 그는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그는 5년 6개월간 간호사로, 9년간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심사 직으로 일한 뒤 서른여섯 살 때인 2001년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독특한 이력의 소설가다. 글을 쓰게 되기까지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느냐고 물으니 그는 “생존 투쟁 때문”이라며 씩 웃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땐 그가 들려준 이십대의 고단한 경험이 ‘생존 투쟁’의 전부인 줄로 이해했다. 신산스러운 이십대를 보내면서도 꿈을 잃지 않은 일편단심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두 번째 만났을 땐 전업 작가가 되기 위해 서른여섯 살에 인생의 방향을 튼 뒤 마흔 두 살에 등단하기까지 그가 살아낸 7년간의 캄캄한 시간이 눈에 밟혔다. 번번이 시험에 떨어지는 고시생처럼 공모전에 잇따라 낙방하면서 어떤 결실도 얻지 못한 채 흘려보내야 했던 시간을 그는 어떻게 버텨냈을까? 그는 “10년 넘게 습작 중인 사람도 있는데 내 7년은 아무 것도 아녜요”하면서 별 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7년이면 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자라 대학생이 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무너지지 않고 견디어낸 것이야말로 그가 작가라는 존재로 자신을 세우기 위해 치러야 했던 진짜 ‘생존투쟁’이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띨띨하다고 말하고 자신을 곧잘 농담의 소재로 삼으면서도,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제 발로 건너본 사람 특유의 단단함을 지녔다. "내 심장을 쏴라"에서 보여준 자신의 문체, 옹골차고 생에의 의지가 강렬한 스스로의 글과도 닮았다. 한 인터넷 서점의 독자 리뷰 란에는 그와 일면식도 없을 독자가 “이 소설을 쓴 작가도 만만치 않은 고뇌와 고통과 어두운 내면의 긴 터널을 통과해온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는 촌평을 올려놓기도 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열정이 몸의 세포를 변화시키는 ‘화학작용’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이걸 못하면 죽을 것만 같다”는 열망이 깊으면 그 자체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간보다 더 길게 버티는 근성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몸 구석구석에 스며든 열망이 타고난 근성인양 몸에 뿌리박힌 성질로 변해 삶을 바꾸는 ‘화학작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의 삶이 직접 입증해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이 일이 아니면 죽을 것 같았다》
전남 함평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는 글짓기 대회를 휩쓸던 학교 대표 글쓰기 선수였다. 글쟁이의 싹이 보였던 그가 긴 우회로를 걷게 된 까닭은 자신과 어머니의 소망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그가 글을 쓰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희곡을 쓰다 속절없이 요절한 외삼촌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의사 딸’을 소망했던 그의 엄마는 6년을 다녀야 하는 의대 교육과정에 맞춘다는 생각으로 여섯 살 난 딸을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그 바람에 그는 광주항쟁이 벌어지던 때 겨우 열다섯 살로 여고 1년생이었고 열여덟 살에 대학 1학년이 되어버렸다.
“의대 가라는 엄마에게 반항도 못하고, 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닌 상태로 어영부영하다가 간호대학에 들어갔어요. 대학 때도 친구들 글쓰기 숙제를 대신 해주면서 언젠가는 내 글을 써야지, 하고 열병처럼 끙끙 앓았지요.”
간호사가 된 뒤 문학공부를 해볼 요량이었지만 이번엔 모진 난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스물두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암 투병을 시작하는 바람에 3년 반 동안 간병을 했는데, 막바지에는 자기가 다니고 있는 병원 중환자실에서 어머니를 돌보며 아예 병원에서 살았다. 중환자실에서 회생 가능성이 없는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겪던 절망감에 몸서리가 쳐졌다던 그는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난 뒤 중환자실 간호사를 그만두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이번에는 동생 셋의 학비를 대야 하는 임무가 과제로 남았다. 동생들 등록금이 한꺼번에 나오는 달이면 대출을 받으러 돌아다니느라 이십 대의 청춘을 누릴 겨를이 없었다.
“이십대엔 살아서 버텨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어요. 인생이 엉켰다는 생각에 울기도 많이 울었지요. 내 삶이 침몰하고 있다는 느낌에 눈앞이 캄캄할 때도 많았고요. 만약 신이 나를 이십대로 되돌려 보내준다 해도 절대로 가지 않을 겁니다.”
동생들이 모두 성인이 되어 버거운 부양의 의무를 마친 뒤인 스물아홉 살에 두 살 연하인 남동생 친구와 결혼을 하면서, 그는 남편에게 집을 사면 직장을 그만두고 내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을 받아두었다고 한다. 틈날 때마다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그의 처녀작은 공모전 당선 훨씬 이전인 2000년 발표한 "열한 살 정은이"다. 문예지가 있는지도 모르고, 소설가가 어떻게 되는지도 몰랐던 그는 혼자서 쓴 작품을 당시 PC통신 문학게시판에 올려보았다. 3분의 1쯤 연재를 해보니 댓글이 꽤 많이 달리고 반응이 괜찮은 편이어서 ‘내 이야기가 싫지는 않은가 보다’하는 생각에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다. 일주일 만에 전화가 왔다. 투고작이 너무 많아 한꺼번에 밀차에 실어 창고로 보내는데 그의 원고가 두 번째 밀차 제일 위에 놓여 있었다고 했다. 밀차 주변을 지나던 편집장이 우연히 원고를 넘겨보았고 그 자리에서 선 채로 다 읽은 뒤 그에게 전화를 한 거였다. 그렇게 해서 그의 생애 첫 책이 나왔다. 곧장 두 번째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2001년 마침내 아파트를 사자 그는 마음을 정해둔 대로 사표를 낸 뒤 집에 들어앉아 글만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가 우물 안 개구리인 줄도 모르고, 세상에 나가기만 하면 다 잘 될 거라는 기대” 때문에 신이 났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오전 7시까지 글을 쓰고 남편과 아이를 내보내고 나면, 오후 늦게 “머리가 더 이상 돌아가지 않을 때”까지 글을 썼다. 첫 책을 내준 출판사에서 두 번째 소설도 잇따라 내준 덕분에 ‘이제 소설가가 됐나보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무명의 그가 쓴 책을 사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출판사도 세 번째 소설까지 펴낸 뒤 더 이상은 못하겠다면서 손을 들었다. 글을 써도 실을 곳이 없고 아무런 인맥도 없던 그가 해볼 방법은 공모전에 도전하는 길 뿐이었다.
그러나 공모전 통과는 만만치 않았다. 잇따라 떨어지다 보니 “나는 너무 하찮은 개구리”라는 절망감이 기대의 자리를 대신 채우기 시작했다. ‘내가 과대망상인 건 아닐까?’,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끊임없이 의심하며 온갖 공모전에 글을 보냈다가 떨어지고, 몸져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쓰는 과정을 해마다 반복했다. “글을 못 쓰면 죽을 것 같아서” 소방서에 근무하는 남편 연봉의 두 배를 받던 직장을 그만두고 시작한 일인데 번번이 떨어지는 스트레스를 감당하기가 힘에 부쳤던 모양이다. 2003년 무렵 뺨이 부풀어 오르고 땀구멍에서 고름이 나오는 증상이 시작돼 병원에 갔다가 희귀병이라는 호산구성 농포성 모낭염 진단을 받았다. 심한 스트레스로 면역체계가 무너져 생긴 질환이라고 했다. 의사가 스트레스 때문에 그렇다면서 소설이고 뭐고 그만두라고 강권했지만, 그는 이 병으로 내리 4년을 고생하면서도 그저 얼굴 때문에 글쓰기를 그만둘 수는 없지 않나 생각했을 뿐이다.
《이겨내야 할 시련은 많기도 하여라》
질병보다 더 힘든 건 패배주의와의 싸움이었다고 한다. 공모전에 잇따라 떨어지다 보니 ‘나는 안 될 거야’하는 생각을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이십대 때부터 문단에서 날리는 작가들을 보면 글 쓰는 사람은 하느님이 따로 점지해주시는가 싶어 절망스러웠고, 아무도 읽지 않는 글만 내리 쓰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자신은 목숨을 걸고 죽자 사자 쓰는데 가끔 친구들이 전화해서 골프를 시작했다는 따위의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너 아직도 글 쓰냐?”하고 물으면 치욕에 몸을 떨었다.
“이겨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밤에 잠이 안 왔어요. 소설 자체만 해도 고민스러운데 소설에서 나오면 내 처지가 고민스러워서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났으니까요. 이십대 초반부터 계획성 없이 살아본 적이 없는데 소설을 쓰면서 처음으로 그런 경험을 해본 셈이죠. 어디다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니까 유리컵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바람에 질겁한 남편이 응급실에 데려간 적도 있고……. 공모전에 계속 떨어지면서 마흔을 넘겼는데 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비참한 기분에 파괴적인 성향까지 드러나더라고요.”
내면의 울분과 절망을 이길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는 엉뚱하게도 샌드백이 도움이 많이 됐다고 했다.
“집에 샌드백을 걸어두고 주먹으로 치고 발차기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어요. 한번은 남편이 퇴근해보니 내가 불을 다 꺼놓고 헤드폰을 뒤집어쓴 채 혼자 중얼중얼하며 샌드백을 치고 있더래요.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1시간가량 그러고 있었더라고요. 샌드백을 세상이라고, 나에게 모욕을 줬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두들기는 거죠. 그러고 나면 좀 나아지고, 하루치 힘이 생기고, 그 힘으로 다음날을 견디고 했지요.”
안하면 죽을 것 같아 시작한 일인데 여기서 무릎을 꿇으면 영원히 꿇는 거라는 독한 마음이 질긴 근성으로 전이되어 체화된 듯했다. 면역력 강화를 위해 운동을 하라는 의사의 조언을 듣고 동네 근린공원을 달리기 시작했는데 뛰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열댓 바퀴씩 공원을 돌곤 해서 동네 마라톤클럽의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았다. 글을 쓰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는 것도 원래부터 아침형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머리가 잘 돌아가게 하는 코티솔 호르몬이 오전에 많이 분비된다는 말을 듣고 생활 패턴을 바꾼 것이라고 한다.
비참한 상황에서는 때로 낙천적인 성향도 어려운 시간을 견디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의 어머니가 말기 암 투병중일 때였다. 어머니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때 남동생이 군대에 갔고, 깨어난 어머니는 입대한 아들의 사복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그는 어머니 대신 남동생 면회를 하러가서 외박을 데리고 나왔다. 두 사람은 부대 근처 절벽에서 번개탄을 피워 삼겹살을 구워먹고 소주를 마시며 새로 나온 무협지 이야기를 하면서 놀았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은 채로. 광주에 돌아오는 차 안에선 너무 슬펐지만 그 당시엔 그런대로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런 순간적 낙천성이 없었더라면 길고 답답한 시간을 견디기 어려웠을 거라고 했다.
그의 캄캄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잇따라 실패하고 소설가가 어떻게 되는 줄도 몰랐다면서 문예창작과 편입 같은 선택을 고려해볼 만도 하지 않았을까? 그는 패배주의에 괴로워하면서도 이상한 오기 때문인지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내 마음대로 할 거야’하는 생각이 강했고 대학 시절에 그를 알아봐준 한 교수가 재능이 있다고 했던 말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간호대학에 와서 교양 국어를 가르치던 외래 교수가 계셨어요. 어느 날 시험을 보는데 백지 시험지를 나눠주고 칠판에 ‘얼굴’이라고 쓰더니 이걸 주제로 마음대로 쓰라는 거예요. 학생들은 갑갑하죠. 쓸 말이 없다고 시험지에 얼굴을 그린 애도 있어요. 그런데 나는 앞뒤로 빡빡하게 써서 냈어요. 며칠 뒤 교수님이 나를 불러 다짜고짜 습작노트를 가져오라 해서 가져갔더니 일주일 뒤에 다시 불러서 ‘국문과로 전과할 생각 없느냐’고 물으셨어요. 나는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하니까 안타까워하면서 ‘글 쓰고 싶지? 절대로 꿈을 포기하지 마라’고 격려해주시더군요. 그 영향이 오래 갔어요. 창작 공부를 하는 학생도 교수에게 그런 인정을 받기 어려울 텐데 아무 것도 아닌 내가 인정받았으니 나도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런 게 이기는 힘이 되었어요. 아무 근거도 없지만 약간 과대망상으로 보일만큼의 자신감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서 자괴감에 질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나름대로 질기게 버텨왔지만 정말 더 이상은 못하겠다는 체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할 무렵인 2007년, 그의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가 제1회 세계청소년 문학상에 당선됐다.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면서 우아하게 책을 보고 있을 때 당선 전화를 받으면 좋겠다고 기대했지만, 정작 당선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변기를 청소하던 중이었다. 그는 전화를 끊고 화장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벼랑 끝에서 구원받으면 이런 심정일까 싶었다고 한다. 관문 하나를 넘었으니 이제 편안히 ‘꽃길’을 걸어도 되련만, 시상식장에서 만난 소설가 서영은의 충고는 그를 다시 가시밭길로 몰아냈다.
“저더러 ‘뒤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라’ 하시더라고요. 안주하지 말라는 뜻이었지요. 여기에 만족하지 말고 성인 문학에 도전해보라는 격려이기도 했고요.”
그 말을 마음에 새긴 그는 쏟아지던 청소년 관련 원고 청탁을 모두 거절한 채 다시 작품에 매달렸다. 다 쓴 소설을 두 번이나 폐기하고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직접 들어가 취재를 하면서 맺은 결실이 2009년 봄에 세계문학상을 타고 영화로도 만들어질 "내 심장을 쏴라"다.
《‘왜’라는 질문에 충분히 대답할 수 있을 때까지》
2010년 2월 다시 만났을 때 그는 가을경 발간될 장편소설을 집필하고 있었다. 세간의 주목을 받는 상을 탄 뒤에도 생활이 달라진 것은 딱히 없고 원고를 들고 돌아다닐 일은 없겠다는 정도라고 한다. 되레 공모전에 번번이 떨어지던 시절의 치열함이 좀 사라진 것 아닌가 싶어서 반성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도 변함없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글을 쓴다. 밥하고 와서 쓰고, 청소하고 와서 쓰고, 오후 5시까지 그렇게 종일 앉아 있다가 밤이 되면 산에 간다. 동네의 낮은 산인 삼봉산을 혼자 걷다보면 쓰고 있는 소설의 이야기가 가닥이 잡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어서 하루도 빠뜨리지 않는다.
“글을 쓰면서 내 인생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어요. 물론 쓸 때야 괴롭지요. 일주일에 하루 정도 글이 잘 풀리면 그날은 구름에 뜬 기분이지만 엿새는 내가 쓴 게 죄다 쓰레기 같다는 괴로움에 자학 모드로 돌아가요. 진도가 나가는 건 갑자기 미치는 하루뿐이고, 나머지 엿새는 괴로워하면서 고치고 다듬고 하는 거죠. 자신감과 혐오감 사이를 쳇바퀴 돌듯 반복하는데 이 패턴이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진 않을 거예요.”
그가 소설을 쓸 때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은 ‘내가 이걸 왜 쓰나’다. 왜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리한 뒤 소설을 쓰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소설을 끝낼 때까지 계속 왜냐고 묻고 그에 대한 답이 긍정적으로 추려지지 않으면 다 쓴 소설도 폐기한다고 했다. 2004년에 심취한 고딕 메탈에서 영감을 받아 쓴 "우리는 알래스카로 간다"도 그렇게 폐기해버렸다. 심지어 세 번을 고쳐 쓴 "내 심장을 쏴라"도 어느 문학상에 당선 없는 가작에 뽑혔지만 상 받는 걸 거부하고 원고를 몽땅 없애버렸다. ‘왜?’에 대한 답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다. 자신에게 그토록 엄격한 창작의 기준을 들이대면서도 그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설가를 예술가 형, 이야기꾼 형으로 나눈다면 나는 후자입니다. 예술을 할 능력도, 의도도 없어요. 시골 서커스단의 만담가처럼 내 글로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고 싶고, ‘꾼’이라는 말을 듣고 싶을 뿐입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이십대의 암흑 같던 우회로, 공모전에 내리 떨어지던 기나긴 세월을 통과하면서 그가 얻은 것도 많다. 중환자실 간호사로 겪은 임상경험은 그가 소설가로 살아가는 데에 좋은 밑천이다. “한 침대 곁을 지날 때 ‘삶’이었던 목숨이 돌아서면 바로 ‘죽음’이 되는 것”을 수시로 겪는 일은 그만한 나이에 하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문예창작과에 가서 창작 수련만 했다면 겪지 못했을 사회생활을 해본 경험, 번번이 실패하고 모욕을 당한 경험 덕택에 역으로 소설가로서 필요한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키울 수 있었다고 자평할 때면, 이게 다 엄마가 내가 글 쓰는 일을 반대해서 이런 길을 돌아온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단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작가로 성공하게 된 요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재능과 불행한 유년시절’이라고 꼽았듯 불행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닐 수 있어요. 물론 결과적인 이야기지만 불행이 사람을 성장시키기도 하지요. 중환자실에서 엄마를 간호할 때 보조침대에서 자면서 엄마 숨소리를 듣고 있으면 ‘이대로 엄마가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는 공포로 까마득했어요. 그렇게 엄마를 보내고 나니 이게 가장 밑바닥일 거라는 생각, 이보다 더 한 일이 있겠느냐는 배짱이 생겼지요.”
그에게 언제가 가장 행복했느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필생의 꿈이던 소설가가 된 지금이 아니라 집만 사면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 쓰기에 전념하겠다는 계획으로 한껏 부풀어 있던 때, 내 인생이 술술 풀릴 거라고 기대하던 삼십대 초반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사람이 가장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꿈을 이룬 뒤보다 꿈을 앞에 두고 마음 설레는 찰나일는지도 모르겠다. 먼 길을 돌아 꿈이 현실이 된 지금, 그가 벼리는 것은 모험정신이다. 공모전에 도전하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지만 소설의 영역을 넓히기 위한 도전은 긴 호흡으로 계속하려 한다.
인생의 방향을 놓고 고민하는 사람이 조언을 청해온다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는 하려는 일이 자기 인생에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인지 그것부터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먼저 자기 자신을 마주 봐야 해요. 이 일이 정말 하고 싶은가 아니면 그것이 성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결과나 외양에 시선이 꽂혀서 하고 싶어 하는가를 구분해야 한다는 거죠. 글을 쓰고 싶다면 ‘글을 써서 뭐할 건데?’부터 대답할 수 있어야 해요. 상을 타고 이름을 알리고 돈을 번다? 이건 아니죠. 그렇게 성공하는 사람은 열 명 중 한 명이 될까 말까 해요. 전부 죽자 사자 하는 건데,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간을 버티게 해주는 힘은 결국 ‘동기’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싶어 하나’가 분명해야 해요. 내가 7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글을 쓰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어요. 직장도 그만두고 가정도 내팽개친 사람이나 다름없었어요. 나는 스스로 존재감을 느끼고 내가 인간적으로 가치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아내일 때도, 엄마일 때도 아니고 오로지 글을 쓸 때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없이 이기적인 사람일 수도 있지만요.”
“글을 쓸 수 없다고 하면 내 인생은 사는 의미가 없다”고 단언하던 그를 바라보며 "내 심장을 쏴라"에 그가 적어둔 ‘작가의 말’이 떠올렸다. 그는 이 소설을 쓰게 만든 질문이 “운명이 내 삶을 침몰시킬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였다고 했다. 대학 3학년 때 실습 나갔던 정신병원에서 만난 젊은 환자에게 받은 느낌을 정리한 문장이었다지만, 운명이 자신에게 적대적이라고 느끼던 시절에 그가 스스로의 삶을 향해 던진 질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내 심장을 쏴라"에서 두 남자 주인공의 분투는 그의 삶과 겹쳐 보였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땐 그의 얼굴이 눈앞에 오버랩됐다. 소설을 쓰게 만든 질문에 자신의 삶으로 답해온 저자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팔을 벌렸다. 총구를 향해 가슴을 열었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야.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