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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말은 결핍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담지 못한다.
모든 말은 과잉이다. 차마 전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들도 전하게 된다."
- 스페인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이가세트 -
모든 말은 과잉이다. 차마 전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들도 전하게 된다."
- 스페인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이가세트 -
이름도 낯선 이 철학자의 말을 요즘 통렬하게 절감한다.
항상 일이 벌어져버린 후에야, 누군가가 떠나버린 후에야 깨닫게 된다.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었는데,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전하지도 못했는데....
그러나 기회는 사라져버렸다. 상대에게 가닿지 못했던 내 마음은, 입안에서 메아리가 되어 저 혼자 떠돈다.
영화 '바벨'을 보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떠들다 끝내 탑이 무너져 버렸다는 성경 속의 이야기처럼, 영화 속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서너개의 이야기 마다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관계가 상황의 핵심에 놓여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모로코의 낯선 땅에서 총에 맞아 죽어가는 아내를 지켜봐야 하는 미국인 여행객, 사소한 태도 때문에 불법 체류자로 몰려 난데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사막을 헤매야 했던 멕시코 여인, 말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 대해 잔뜩 독기를 품은 청각장애인인 일본 소녀....
이 영화에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은 언어의 차이 때문에 생겨나는 것만은 아니다. 경찰은 상대의 설명을 전혀 듣지 않고 몰아붙이기만 하고, 심지어 '같은 언어'로 말하는 미국 대사관 직원들조차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절박한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으며 앰뷸런스도 보내지 않고 미적댄다.
영화를 보며 가슴이 터질 것처럼 미어졌다.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뭔가를 시도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상황이 나빠지는 이런 관계에서 도대체 소통이란 게 가능하긴 한 걸까.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는 무구한 관계에 대한 희망, 그런 건 환상에 불과한 걸까.
다행히도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자그마한 희망의 여지를 열어놓았다.
난데없는 총격으로 위기에 처한 미국인 부부는 그전에 이미 남남이나 마찬가지인 관계였지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서로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세상에 대해 날을 세우던 일본 소녀는 낯선 형사를 붙들고 오열한 뒤 아버지와도 화해하려는 작은 몸짓을 보인다.
내가 보기에 마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상황들의 공통점은, 등장인물들이 '바닥을 쳤을 때'가 아니었나 싶다.
너무나 절박할때, 더 이상 계산할 무엇, 패를 돌려볼 카드가 내 손에 남아있지 않을 때,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서는 살아가는 일이 도저히 불가능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남의 말을 곡해하지 않고,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어떤 관계의 상실을 후회하고 있는 나는 아직 절박하지 않아서, 손해보지 않으려고 먼저 이해득실부터 따져보는 장삿꾼같은 속셈 때문에, 사람을, 기회를 놓쳐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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