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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자가 되면 어떻게 하죠? 아빠는 패배자를 싫어해요…” (올리브)
“얘야, 패배자가 뭔지 아니? 지는 게 두려워 아예 도전조차 안하는 사람이야.” (할아버지)
  -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할아버지와 손녀 올리브의 대화 -

최근에 본 가장 재미있는 영화로 난 주저 없이 ‘미스 리틀 선샤인’을 꼽겠다.

(원제가 ‘리틀 미스 선샤인(Little Miss Sunshine)’인데 왜 ‘미스 리틀 선샤인’으로 국내 개봉 제목을 바꿨는지 당최 모르겠다. 국내에서도 어린이 미스코리아 대회를 ‘리틀 미스 코리아’, 라고 부르지 않았었나???)


저예산 영화로 소품 규모인데도 지난해 미국 영화연구소(AFI)등에서 뽑은 ‘올해의 영화 10’ 리스트에 꽤 많이 올랐던 영화다.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로도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는 모양이다.


이 영화는 ‘패배자 (Loser)’에게 바치는 따스한 찬가라 할만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류의 격려성 영화여서가 아니다. 이 영화는 “세상에는 승자와 패자, 두 종류의 인간만 있다”고 믿는 미국식 성공관념을 기분 좋게 뒤집는다. 그리고 영화에서 그 전복의 힘은 연민과 삶에 대한 긍정에서 나온다.


이 집안, 꼴이 가관이다. 올리브의 아버지는 ‘인생불패 9단계 비법’을 만들어 성공학 강사로 뜨고 싶어 안달하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짜증 만땅인 엄마는 밥상에 허구헌 날 프라이드치킨만 올려놓으며 남편이 대박을 터뜨리기만을 바랄 뿐이다.

올리브의 오빠 드웨인은 좀 이상한 얼간이 같다. 열렬한 니체의 추종자이자, 비행조종사가 되기 위해 아홉달동안 침묵시위중이다.

그뿐인가. 할아버지는 색골에 마약을 하다 양로원에서 쫓겨났고, 외삼촌 프랭크는 자칭 최고의 프루스트 전문가이나 인정받지 못하고 게이 애인마저 빼앗겨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 마저 실패한다.

이 가족이 함께 ‘울며 겨자먹기’로 장거리 여행에 나서도록 만든 올리브는 미인대회의 환상에 푹 빠져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에 출전하지만, 실상은 그런 대회 출전자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유난히 뱃살이 볼록하고 커다란 안경을 쓴, 촌스럽고 귀여운 꼬마일 뿐이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이 가족은 고물차를 몰고 함께 길에 나서고, 그들은 괴롭지만 보는 이는 계속 웃을 수밖에 없는 길 위의 개그가 시작된다. 온갖 황당한 일들이 벌어지므로 그냥 코믹 로드 무비로 보아도 좋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까닭은 (무엇보다 일단 영화가 재미있기도 하지만) 단 한순간도 메시지를 전하려고 목소리에 힘을 주거나 억지스러운 화해, 해피엔딩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이 길 위에서 뭔가를 크게 깨닫거나, 과거와 달라지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계속 실패하고 뭔가를 잃고 허둥댄다. 영화 막바지에 지금까지의 모든 고생을 보상해줄 멋진 한 방을 집어 넣을만도 하건만, 감독은 영리하게 그런 할리우드식 해피엔딩의 유혹을 피해갔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지금까지 해온 그대로의 ‘닭짓’을 끝까지 계속하며 관객을 웃긴다.

누구 하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갈등은 여전하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들은 계속 허방다리를 짚으며 살아갈 것이지만, 그게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삶이라는 느낌, 각자 자신의 방식과 그 나름의 개성을 버리지 않아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그런 무한한 긍정을 갖게 만드는 영화다.


보고 나면 인생에 승리 혹은 패배, 그런 게 어디 있겠어, 안그래? 라고 묻는 듯한 영화의 톤에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중요한 건 승리 혹은 패배가 아니라 고통까지 포함해 자기 몫의 삶을 살아가는 것일 터.... 자칭 ‘프루스트 전문가’인 외삼촌 프랭크는 ‘고등학교를 건너뛰고 싶다’는 조카 드웨인의 푸념에 이렇게 답해준다.


“프랑스 작가 프루스트야 말로 완전한 패배자야. 게이에다 아무도 안읽는 책을 20년 동안 썼지. 그래도 나중에 그는 ‘고통 속에서 보낸 나날이 그대를 만들었으니 그 때가 가장 행복했노라’고 말했어. 고등학교야 말로 고통의 최고봉인데 가장 행복한 시절을 건너뛰면 어떻게 하니. 고통이 없으면 고통을 추억할 수 있는 즐거움도 사라지고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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